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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히말라야의 불청객

입력
2016.07.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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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업과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사원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은 기나긴 돌계단이다. 해발 3,700m. 산소 부족으로 밤새 두통, 구토, 설사에 시달린 관광객에게는, 경사가 급하든 완만하든, 계단이 다섯개든 1,000개든 큰 상관이 없다. 모든 계단은 그저 기나긴 계단일 뿐이다. 힘겹게 계단을 오르다 보면, 가마나 말을 타고 올라가는 이들에게 추월을 당한다. 잠시 숨을 돌리려고 주저앉는다. 희박한 산소는 정념 또한 희석하고 있다. 영혼의 정화는 이미 시작된 것인가.

성스러운 사원은 흰 벽돌담에 검은 지붕을 얹은 소박한 건물이다. 건물 앞에는 작은 사각형 욕조 두개가 있고, 건물 뒤로 영혼의 샤워장이 반원형으로 펼쳐져 있다. 수퇘지 머리 형상인 108개의 샤워 꼭지에서 성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물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갑다. 이곳에 오려고 평생 푼푼이 돈을 모으고 푼푼이 죄를 쌓은 사람들이 욕조 주변에서 주섬주섬 옷을 벗는다. 욕조에 잠시 몸을 담그고, 벽을 따라 달리며 108개의 물줄기를 맞는다. 관광객은 신발과 양말만 벗고 물줄기를 향해 손을 내민다. 손이든 머리든 물이 몸에 닿기만 하면 죄와 업이 사라진다는 요행수를 노리는 것이다.

경건한 분위기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치고, 쇠사슬을 목에 걸고, 가죽 부츠를 신은 백인 남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큰 소리로 떠들며 거침없이 옷을 벗고 술통처럼 출렁이는 허연 몸을 드러낸다. 첨벙첨벙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가 성수가 쏟아지는 샤워장을 활보한다. 평생의 업과 죄가 단 오분 만에 씻겨나가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듯 온통 축제 분위기다.

죄와 업을 씻고 육신의 천국 혹은 영혼의 천국을 기원한 뒤, 사람들은 묵티나트를 떠난다. 산을 내려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버스나 지프를 타는 사람, 모터바이크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절벽 위의 좁은 길을 위태롭게 달려내려 갈 때, 관광객은 안전하게 누구도 방해하지 않으며 내려가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틀이나 사흘쯤 터벅터벅 걷다 보면, 흐르는 강물 옆에서 느닷없이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곳에 이른다. 따뜻한 물이라는 뜻의, 따또파니라는 이름을 지닌 노천온천이다. 이곳에는 맥주나 애플파이 같은 맛 난 것들도 있다. 사람들은 속세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땀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몸을 씻는다. 제법 큰 사각형 욕조 두 군데에 남자와 여자가 뒤섞여 수영복 차림으로, 혹은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다. 산 위에서 죄와 업을 씻은 뒤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속세로 내려온 허연 몸의 남자들도 맑은 영혼인 양 웃으며 서로에게 물을 튕긴다.

음료수를 마시며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허리께에 주황색 천을 두르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 하나가 길고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다. 구걸하며 떠돌아다니는 수행자의 행색이다. 영혼만 남은 듯 수척한 그의 갈색 몸에는 흙과 먼지가 더께로 앉아 있다. 그가 정수리에 높이 똬리를 틀어 얹은 잿빛 머리카락을 풀기 시작하자, 욕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현지인 하나가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그는 잠시 멈칫하지만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다시 굼뜬 동작으로 한 가닥 한 가닥 머리를 푼다. 대걸레 뭉치처럼 거칠고 묵직해 보이는 머리 타래가 뒤꿈치까지 축 늘어진다. 그의 한쪽 발이 물에 닿는 순간, 사람들이 앞다투어 욕조를 벗어난다. 관광객도 아쉬워하며 따뜻한 물에서 몸을 일으킨다. 사방은 금세 고요해지고, 텅 빈 욕조에 노인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저 높은 곳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세례를 받아 깨끗해진 영혼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옴마니밧메훔. 저 멀리 히말라야의 빙하 녹은 물이 굽이쳐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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