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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막의 자유인, 앤서니 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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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막의 자유인, 앤서니 퀸 사망

입력
2014.06.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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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小史]

제139회 - 6월 첫째 주

할리우드의 명배우 앤서니 퀸이 2001년 6월 3일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사진은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할리우드의 명배우 앤서니 퀸이 2001년 6월 3일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사진은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세계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미국의 명배우 앤서니 퀸이 2001년 6월 3일 86세를 일기로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넉넉한 풍채와 호방한 웃음으로 60년이 넘는 기간을 스크린에서 활약한 그는 ‘길’ ‘아라비아의 로렌스’ ‘노틀담의 꼽추’ ‘그리스인 조르바’등 150여 편의 영화에서 명연기를 선보이며 세계 영화 팬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1915년 멕시코 치와와에서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멕시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퀸은 2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하지만 일찍이 아버지가 사망하자 소년가장이 되어 권투 스파링 파트너와 구두닦이 생활을 이어가며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건축가의 꿈을 가졌던 그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우연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잡일을 하러 배우학원에 갔다가 연기에 빠져든 것이다. 18세 되던 해 ‘깨끗한 침대’라는 연극을 통해 처음 무대에 올랐고 36년, 첫 장인어른이 된 세실 더밀 감독의 ‘평원아’에 출연하며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40년대 말, 매카시즘의 광풍을 피해 뉴욕으로 무대를 옮긴 퀸은 엘리아 카잔의‘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52년에는 멕시코 혁명지도자의 삶을 다룬‘혁명아 사파타’로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때부터 스타로 가는 길은 탄탄대로였다. 56년, 빈센트 반 고흐의 일생이 담긴 ‘열정의 랩소디’에서는 고흐의 예술 세계를 이끄는 고갱 역을 맡아 강인한 인상을 남기며 두 번째 오스카를 품에 안았다. 고흐 역을 맡은 커크 더글러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그의 섬세한 감정 연기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할리우드의 명품배우가 된 퀸은 이로부터 50여 년간 은막을 누비며 다채로운 역을 소화했다. 왕으로부터 인디언, 교황, 권투선수, 농부 등 수 많은 역을 소화하며 선 굵은 연기와 중후함으로 세계 영화 팬들을 사로잡았다.

영화 못지않게 화려한 것은 그의 여성편력이었다. 세 번의 결혼을 통해 그가 얻은 자녀는 9남 4녀로 무려 13명이나 되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96년, 81세의 나이에 40여 년 연하의 비서와 결혼해 증손녀 뻘의 딸을 얻은 사실이다. 확인되지 않은 비공식 자녀가 3명이나 더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걸 보면 그의 노익장이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생전 그가 가장 애착을 보였던 역은 64년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였다. 평소 “내가 바로 조르바 그 자체”라고 애기했던 그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말년에 작가와 조각가로 변신한 퀸은 98년 12월 한국을 찾아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전을 가졌으며 2001년 실베스터 스탤론과 공연한 ‘어벤징 안젤로’를 유작으로 남겼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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