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윤주 기자

등록 : 2017.11.14 06:18
수정 : 2017.11.14 14:36

한국문학상 정세랑 “혐오 마주봐야 하는 게 작가 책무"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인터뷰

등록 : 2017.11.14 06:18
수정 : 2017.11.14 14:36

정세랑 작가는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근무했던 2012년 “문학상 받아보려고” 전업 작가를 선언했다.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미소 인턴기자

“정말요? 정말요?” 수상 소식을 전하는 전화 수화기 너머의 흥분은 흡사 신춘문예 당선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며칠 전 예지몽을 꿨다”며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가감 없이 표현한 이 작가의 이름은 정세랑(33).

2010년 장르문학 전문지 ‘판타스틱’에 소설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한 그는 3년 뒤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오가고 있다. 1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정 작가는 “어느 분야에서도 뚜렷하게 주목받지 못해 ‘한국문학의 서녀(庶女)’인 줄 알았는데, 순문학 적자의 대표상을 받게 됐다”고 활짝 웃었다.

정 작가가 등단 후 7년간 써낸 장편소설은 이번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피프티 피플’을 포함해 6편이다. 아직 단행본으로 내지 않고 발표한 단편소설이 25편에 달한다. 동세대 어느 작가에 뒤지지 않은 소출을 자랑하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작가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다. 등단부터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기까지의 과정은 “제가 저 자신을 몰랐던” 여정이었다.

대학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했던 그는 역사적 사실에 온갖 상상력을 가미한 리포트를 자주 제출했고 “역사보다는 국문학이 적성에 더 맞겠다”는 교수들의 조언으로 3학년 때부터 국문학을 포함해 복수 전공했다. 졸업 후 광고회사 취직을 준비했지만 30여 군데 면접에서 낙방하고 고민 끝에 문을 두드린 회사가 대형 출판사 민음사였다. “열심히 만든 작품을 몇 개월 만에 철수해야 하는 광고업계서 인턴 일을 해보니 생명력이 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처음 도전한 출판사의 시험 문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지적한 ‘시일야방성대곡’ 원문을 요즘 말로 풀이해 적는 것이었고 전공을 살려 거뜬히 통과, 어린이책 편집자를 꿈꾸며 입사했다. 하지만 한국문학 편집팀에 발령받아 문학잡지와 단행본을 만들다 공모전에 소설까지 투고하게 됐다. “항상 최종심까진 갔는데 심사위원들께서 순문학잡지 말고 장르문학 잡지에 투고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판타스틱’에 투고하고 다음날 연락 받았어요.”

장편 ‘피프티 피플’ 역시 편집자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애초 출판사에 연재를 제안한 소설은 2편이었는데 편집자는 그 중 ‘피프티 피플’을 선택했다. 원고지 62.5매 분량을 쓴 후 “다른 작품 쓰겠다”고 포기한 작가에게 “이 작품이어야 한다”고 설득한 편집자는 각 편의 에피소드에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인물 관계도에서 틀린 점을 바로잡고, 결말도 함께 고민했다. 작가는 “평생 한번밖에 쓸 수 없는 형식의 소설로, 제일 좋아하는 문학상을 수상해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해 봄 창비 블로그에 연재하고 11월 출간한 ‘피프티 피플’은 제목처럼 50명, 정확히 51명의 인물의 사연을 옴니버스처럼 묶은 소설이다. 수도권 근교의 한 대학병원을 무대로 의사, 레지던트, 간호사, 주부, 경비원, 사서, 카페 주인 등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미줄처럼 엮인다. 느닷없이 맨홀에 빠지고(배윤나), 갑작스럽게 괴한의 칼에 목을 찔리는(승희) 에피소드를 보면서 독자는 “살아 있는 게 간발의 차”라는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작가는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가 단단하지 않고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시절 삼풍백화점 근처에 살았는데 붕괴 당시 기억이 떠오르면서 발 밑이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앞선 이야기에서 조연으로 등장했던 인물이 다음 이야기에선 주연이 되고, 그 주연은 다시 다른 이야기에서 엑스트라로 나온다.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작가가 각 인물에 이름을 지어준다는 점이다. 가습기 살균 피해자와 유가족(한규익), 층간 소음에 시달리는 주민(김시철) 등 제각각 자기에게 적합한 이름들을 지닌 이들은 우리 사회를 대변하고 있다. 304명 희생자의 이름을 기록하게 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세월호에 대해 한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분들이 많더라”며 “참사를 보면서 제 억눌렸던 기억이 되살아났을 수는 있지만 아직 세월호는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한 극장에 모인다. 물론 각자 서로 모른 채로. 영화관에 불이 나자 물탱크를 열자는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공구를 찾아내 파이프를 분리하고 호스로 연장한 뒤 불길을 제압한다. 모두가 조금씩 손을 보태고 결국 “아무도 죽지 않았다.” 출간 당시는 물론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에서도 반응이 첨예하게 엇갈린 이 결말에 대해 작가는 말했다. “(우리 사회를 축약한) 모델하우스 같은 소설이라 지붕이 필요했다. 소설에서는 (이상적 결말을) 꿈꿀 수 있지 않나.”

“한 손에 탁 들어오는 연애소설을 좋아했던” 그는 “어떤 장르를 써도 혐오를 마주봐야 하는 책무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더 단단해 질 거라는 각오였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정세랑 작가가 걸어온 길

▦1984년 서울 출생 ▦고려대 역사교육과 졸업 ▦2010년 ‘판타스틱’으로 등단 ▦제 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싶어’(2011), ‘지구에서 한아뿐’(2012), ‘이만큼 가까이’(2014), ‘재인, 재욱, 재훈’(2014), ‘보건교사 안은영’(2015), ‘피프티 피플’(2016)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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