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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품 공여자 죽었지만… '전달자의 입'이 유무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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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품 공여자 죽었지만… '전달자의 입'이 유무죄 가른다

입력
2015.04.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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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현대 비자금 사건, 정몽헌 前회장 檢조사받다 자살

돈 전달자 진술 구체성ㆍ일관성 따라 박지원은 무죄, 권노갑은 유죄

成장부 찾아도 복기 장부 땐 신빙성↓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사.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사.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금품을 줬다는 공여자가 사망한 금품수수 사건. 이달 13일 구성된 ‘성완종 리스트’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대전지검장)은 시작부터 가시밭길이 예상됐다. 15일의 수사기간을 거쳐 수사팀은 “기초공사가 거의 마무리됐다”며 본격적인 금품수수자 소환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성완종(64ㆍ사망)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입’을 대신할 ‘비밀 로비 장부’는 존재여부조차 오리무중이라 수사팀이 돌파해야 할 난관은 첩첩산중이다. 과거 공여자가 사망한 금품사건 판례를 통해, 성공한 수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짚어봤다.

전달자 진술로 유무죄 갈린 ‘현대 비자금’

2003년 8월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의 투신자살로 정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알고 보니 그는 금강산 카지노 허가청탁과 함께 2000년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각 150억원, 200억원을 줬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상태였다. 공여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기소된 두 피의자의 운명은 엇갈렸다. 1ㆍ2심은 박 전 장관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지만, 2004년 대법원이 파기했고 최종 무죄를 선고 받았다. 대법원은 금품 전달자인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진술을 믿지 않았다. “양도성예금증서(CD) 전달 시간, 현장검증 뒤 차를 주차한 장소 등 진술 일관성이 결여돼 진실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였다.

반면 권 전 고문은 대법원에서도 유죄가 인정돼 3년 5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이익치 전 회장을 비롯해 연쇄적으로 4명의 전달자가 존재할 뿐 아니라, 비자금 활용 계좌가 확인되고 현장 검증에서 현금 상자를 급경사로에서 운반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점도 혐의를 뒷받침했다.

이 사건은 ‘성완종 리스트’사건에서 유일하게 전달자가 등장하는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경우 대입해 볼 수 있다. 성 전 회장이 전달자인 윤승모 전 부사장에게 1억원을 건넨 것은 관련자들의 진술이 일치한다. 다만 “이 돈을 전달했다”는 윤 전 부사장과 “받지 않았다”는 홍 지사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검찰로선 두 사람의 당시 동선을 객관적으로 복원하고,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이 일관적인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비자금 사건을 포함해 공여자가 사망한 금품사건 관련 판결문들에선 ‘거액을 피고인에게 전달하면서 제대로 전달됐는지 여부를 바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금품을 받고) 감사 인사도 없었다는 건 피고인에게 금품이 전달됐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등의 지적들이 있는데, 성 전 회장이 홍 지사에게 직접 확인했다는 녹음 파일 등을 남겼다면 입증력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서울시의원 사건, ‘매일기록부’의 위력

검찰은 지난해 12월 ‘서울 강서 재력가’ 살인교사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김형식(45) 전 서울시 의원을 뇌물 등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피살된 재력가 송모(당시 67세)씨가 작성한 장부인 ‘매일기록부’를 토대로 1심 재판부가 살해 동기를 인정한 점이 결정적이었다. 김 전 시의원은 송씨 부동산의 용도를 변경하거나 송씨와 경쟁관계에 있는 예식장업체의 건물 신축을 막아달라는 청탁과 함께 5억2,000만원을 받은 뒤 송씨로부터 상환 압박에 시달리자 친구를 시켜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법원이 장부의 신빙성을 높이 인정한 것은 송씨가 1991~2013년 22년 간 돈을 건넨 내역을 통상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김 전 의원이 직접 쓴 ‘차용증’서명 또한 김 전 시의원이 돈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스모킹건’이었다. 검찰은 당시 살인교사 사건에서 매일기록부와 차용증을 살해 동기의 증거로 인정한 판결문을 보고 자신 있게 뇌물 혐의 추가 기소를 결정했다.

이번 ‘성완종 리스트’사건에서 검찰은 ‘찾으면 축복’이라 말할 정도로 성 전 회장의 로비장부 찾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 전 회장이 금품을 준 뒤 그때그때 기록한 장부가 아니라, 사망 직전 과거 금품제공을 기록한 ‘복기 장부’가 있을 것이란 추정도 나온다. 재경지법 소속 현직 판사는 “성 전 회장이 숨지기 직전에 남긴 ‘성완종 리스트’ 메모는 자필로 쓴 게 확인돼 증거로 쓰일 수 있다”면서 “하지만 복기장부의 경우 사후적으로 작성했다면 통상적인 기록이 아니어서 (재력가 송씨가 남긴) 매일기록부 보다는 신빙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금품이 오간) 객관적인 정황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수사의 관건일 것”이라고 했다.

판사들 “금품 건넨 시기와 서로의 사정 밝히는 게 중요”

재경지법의 현직 판사들은 대체로 공여자가 사망한 금품사건에 대해 “(일반 사건에 대한 판단과)다르게 구분할 잣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자유심증주의’에 따라 돈이 오고 간 정황을 꼼꼼히 따지는 건 대체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금품 공여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객관적인 정황 증거에 반할 경우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한 형사재판 담당 판사는 “공여자가 사망하면 피고인의 (공여자 진술을 반박할) 반론권이 제약돼 돈 전달자 등 관련자 진술을 더 엄격한 잣대로 따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중견 판사는 “성완종 리스트의 경우, 공여자가 돈을 전달해 얻는 이익과 돈을 받은 사람이 금품이 필요했던 사정, 둘의 관계 등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며 “그런 상황과 시기들이 여러 물증과 진술 등과 맞아 떨어지면 유죄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죄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죽기 전에는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통념일 뿐 법관은 그런 사정보다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으로’라는 원칙으로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까지 다 헤아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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