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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흑인 차별에 묵묵히 법적 정의로 맞선 백인

입력
2014.12.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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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대학 입학 투쟁 지원

1960년대 인권 담당 검사, 시민권법ㆍ선거권법 초석 다져

흑인 인권 투쟁 현장 누빈 경험

방송ㆍ책으로 한 번도 안 드러내

존 도어는 미국 법무부 인권담당 검사로 세 명의 대통령을 보좌했다. 아이젠하워(공화당)-존 F 케네디(민주당)- 린든 존슨(민주당). 그는 공화당 지지자였고, 닉슨(공화당)의 워터게이트사건 의회 특별검사로 활약했다. 인권이 이념에 앞서고 법 정의가 권력에 종속돼선 안 된다는 것을, 또 공무원으로서 그 신념을 실천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보여줬다. 사진은 2012년 5월 미 백악관에서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는 존 도어. AP 연합뉴스.
존 도어는 미국 법무부 인권담당 검사로 세 명의 대통령을 보좌했다. 아이젠하워(공화당)-존 F 케네디(민주당)- 린든 존슨(민주당). 그는 공화당 지지자였고, 닉슨(공화당)의 워터게이트사건 의회 특별검사로 활약했다. 인권이 이념에 앞서고 법 정의가 권력에 종속돼선 안 된다는 것을, 또 공무원으로서 그 신념을 실천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보여줬다. 사진은 2012년 5월 미 백악관에서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는 존 도어. AP 연합뉴스.

2012년 4월 USA투데이는 미국 백악관의 대통령 자유메달 수상자 13명의 명단을 전하며 인권 법률가 존 마이클 도어(John Michael Doar)의 이름 앞에 ‘다소 낯설지 모른다’는 수식을 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란히 놓인 이름들이 미국의 첫 여성 국무장관 메들린 올브라이트, 가수 밥 딜런, 작가 토니 모리슨, 스타 우주항해사 출신의 전 미 상원의원 존 글렌 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존은 미국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용감한 법률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60년대 미 법무부 인권국 검사로서, 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의회 특별검사로도 활약했다.

미국의 60년대는 200년 흑인 차별의 ‘전통’에 대해 흑인과 소수의 백인이 조직적 저항을 벌였던 시기다. 그 시기 도어의 자리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와 자유 평등 정의 같은 보편적 가치를 둘러싼 거친 질문과 근원적 갈등들에 국가를 대신해서 판단하고 답변해야 하는, 모두가 껄끄러워하던 자리였다. 그는 권력과 법이 맞설 때 법의 편에 섰고, 힘센 관습과 소수의 요구가 부딪칠 때 그 요구의 법적 타당성을 먼저 따졌다. 공적 사명을 부여 받은 연방 공무원으로서, 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서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그 일이 그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절박하고 첨예한 일이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의 목숨이 희생됐다. 그는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 엑스, 혹은 당대의 몇몇 저명 인권 운동가에 버금가는 영예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또 세상이 많이 나아진 뒤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행적을 삶의 밑천 삼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수많은 익명 대중의 피와 땀을 딛고 ‘역사에 남는 맨 꼭대기의 시시한 자들’이라는 노엄 촘스키 식의 냉소도 모면한 드문 영웅이었다.

# 1961년 5월 미시시피주의 흑인 청년 제임스 메리디스(James Meredithㆍ81)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미시시피대학에 등록원서를 낸다. 그의 성적은 입학하고도 남을 만큼 우수했지만 대학 당국은 두 차례나 등록을 거부한다. 그가 흑인이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의 민주당 주정부 역시 메리디스가 유권자법 위반으로 실형을 산 이력을 빌미로 대학측을 편든다. 주정부와 대학 역시 인종주의적 편견 속에 있었지만,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 뒤에는 성난 백인 유권자들이 있었다. 식당, 술집은 물론 버스 정류장에서도 흑인들은 백인과 공간을 공유할 엄두를 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 남부의 거의 대다수 주가 그러했다.

1962년 존 도어(사진 오른쪽)가 미시시피주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학생 제임스 메리디스(사진 가운데)와 함께 등교하는 장면. Library or congres (loc.gov)에서.
1962년 존 도어(사진 오른쪽)가 미시시피주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학생 제임스 메리디스(사진 가운데)와 함께 등교하는 장면. Library or congres (loc.gov)에서.

메리디스는 미국 최대의 흑인인권단체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소속 회원이었다. 그는 “내가 하려는 일이 어떤 어려움에 직면할지 잘 알고 있고, 또 감당할 준비가 돼 있다.(…) 누구도 나를 억누를 수 없다”고 말했다. 수 차례의 청문회와 재판을 거쳐 미 연방 대법원은 그의 입학이 정당한 권리임을 인정했고,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도 수 차례 당시 주지사를 전화로 설득한 끝에 62년 10월 대학측은 메리디스의 등록을 승인한다. 하지만 백인 시민 학생들은 격렬한 시위로 실력 저지에 나섰고, 그 와중에 두 명의 흑인이 숨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메리디스 역시 살해 협박에 시달린다. 첫 등교일, 존 도어 인권국 수석검사는 연방 보안관과 함께 메리디스와 나란히 교문을 들어섰다. 그는 근 한 달 동안 메리디스의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의 일터는 가장 취약한 인권의 곁이었다. 당시 대학과 학교 인근에는 연방 군인 500여 명이 배치돼 소요사태에 대응했다. 메리디스는 훗날 미국의 저명 인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미시시피 대학 교정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 메리디스의 용기와 실천은 1909년 출범한 이래 NAACP의 활동가와 흑인들이 피 흘리며 개척한 길 위에서 출발했고, 그의 입학투쟁 역시 NAACP의 조언과 조직적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당시 NAACP 미시시피 지역 위원장이 미드가 이버스(Medgar Evers, 1925~1963)였다. 메리디스와 존 도어의 친구였던 이버스는 63년 6월 자신의 집 앞에서 백인 극우단체 회원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미온적인 수사…

이버스의 장례식이 끝난 뒤 500여 명의 분노한 흑인들이 돌과 화염병으로 무장 진압경찰과 맞섰고, 경찰은 발포 위협을 시작했다. 그 때, 50미터도 안 되는 그 대치 전선의 한 가운데로 흰 셔츠 차림의 존 도어가 걸어 들어갔다. 대학 농구팀에서 뛴 적도 있는 195cm의 건장한 체구를 지닌 그는 성난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내 이름은 존 도어입니다. D-O-A-R. 나는 미 법무부에서 나왔고 정의를 위해 여기 섰습니다. 돌과 화염병으로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버스 역시 이 방식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흑인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비록 백인이지만 그의 신념과 용기를 신뢰했다. 시위대는 해산했다. 현장에 있었던 언론인 칼 플레밍은 2005년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양측 어느 쪽으로부터도 그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 아드레날린이 펑펑 쏟아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어의 말과 행동은 마치 법정의 판사처럼 침착했다. 지금껏 살면서 내가 경험한 가장 용감한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한 언론은 그를 ‘격동의 남부를 지킨 보안관 딜런(Dillon, 존 매스턴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의의 보안관)’이라 묘사하기도 했다.(LA타임스)

존 마이클 도어
존 마이클 도어

존 마이클 도어는 1921년 12월 3일 미니에폴리스에서 태어나 위스콘신 뉴리치몬드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는 프린스턴대를 거쳐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법학 학위를 받고 변호사가 됐다. 2차세계대전 중 공군에 입대해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했고, 50년대 내내 뉴리치몬드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역 변호사로 일했다. 아이젠하워 정부 말기인 60년 그는 법무부로 자리를 옮긴다. 그의 첫 보직은 인권국 차장(deputy chief). 앞서 제안받은 세 사람이 사양한 자리였다. 그는 67년까지 만 7년간, 미국 역사상 가장 뿌리깊은 현안이 가장 뜨겁게 분출되던 그 시기의 최전선에 있었다.

1954년 미 연방대법원은 흑백분리법을 위헌으로 판결(일명 ‘브라운판결’)한다. 2차 대전 전후 군수산업 노동자의 유입으로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 대도시 흑인 인구가 급증했고, 참전한 흑인들의 활약 등으로 그들의 위상이, 적어도 미 서부와 북부지역에서는 예전 같지 않던 때였다.

‘딥 사우스(deep south)’라 불리는 남부 인종차별지역의 흑인 민권 운동도 그 즈음부터 조금씩달아오르기 시작한다. 1955년 시작된 로자 파크스(Rosa Parks, 2005년 작고)의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시 버스 보이코트 운동, 56년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한 인권단체 ‘남부 기독교 지도자회의(SCLC)’의 발족…. 하지만 저 활동들은 남부지역 전역을 들끓게 할 만한 거대한 불길로 커지진 못했고, 대신 백인 극우세력을 자극해 KKK의 회원 수와 조직을 급격히 키우는 결과로 이어진다.

대중적 흑인 인권운동의 전기는 아무래도 61년 5월 시작된 ‘프리덤 라이더스(Freedom Riders)’ 캠페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종평등회의(CORE)가 주도한 이 캠페인은 흑인과 백인 시위대가 두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남부지역 깊숙한 곳들을 누비며 백인 전용 대합실과 식당 화장실 등을 함께 이용하자는 거였다. 흑백분리법과 차별적 관행에 대한 평화적이면서도 선명한 도전이었던 셈이다. 백인들의 폭행은 다반사였고, 버스에 불을 질러 다수가 화상을 입는 일도 빚어진다. 하지만 경찰은 그 불법의 현장을 외면하거나 방관했고, 오히려 시위대를 투옥하는 일도 생긴다. 존 도어도 참관인으로서 그 버스에 함께 있었다. 앨러배마 몽고메리에서는 그의 법무국 동료 가운데 한 명이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기도 한다.

이버스가 피살당한 63년은 흑인 인권단체들을 주축으로 유권자 등록캠페인이 막 시작된 때였다. 그 해 6월, 단체들은 자원봉사자를 모집, 오하이오주 웨스턴 여자대학에서 ‘자유의 여름(freedom of summer)’ 연수를 시작했다. 활동가들은 대중 설득과 조직화 훈련뿐 아니라 경찰이나 백인들의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받았다. 64년 유대계 백인 두명과 흑인 한 명으로 구성된 선발대 3명이 미시시피주에서 피살된다. 존 도어는 수석검사로서 사건에 연루된 17명을 기소,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게서 카운티 보안관 대리와 지역 KKK의장을 비롯한 7명의 피고에 대해 유죄 평결을 받아낸다(67년). 흑인에 대한 백인의 범죄에 백인을 기소하는 것조차 이례적이라 평가받던 때였다. 그 사건은 88년 앨런 파커 감독의 영화 ‘미시시피 버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65년에는 흑인 유권자 등록운동에 가담한 백인 자원봉사자 비올라 류조(Viola Liuzzo)를 살해한 세 명의 백인을 기소, 역시 전원 백인 배심원단으로부터 10년 형을 받아낸다. 그는 그 해 유권자 등록 홍보를 위한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가했고, 백인 사회의 조직적인 공민권 박탈에 맞선 소송에도 적극 가담, 하루에 세 개 주의 법정을 돌며 흑인 선거권을 옹호하기도 했다고 워싱턴포스터는 전했다. 프리덤 라이더스의 리더 가운데 한 명인 존 루이스 전 애틀란타주 하원의원은 “존 도어는 60년대 흑인 인권투쟁의 거의 모든 현장에 있었고,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가 없었다면 당시 우리가 어떤 일을 겪게 됐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LA타임스) 물론 도어 역시 그 과정에 셀 수 없는 위험과 위협을 겪었지만, 그는 인권운동가가 아닌 법률가로서 그리고 인권 담당 연방 공무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묵묵히 임했다.

미 연방정부는 1964년 시민권법을, 65년 선거권법을 제정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자유메달을 수여하며 저 두 법령의 초석을 다진 주역으로 그의 공을 기렸다. 67년 법무부를 떠난 뒤 그는 린든 존슨 정부에 의해 뉴욕 브루클린 흑인 거주지역 개발 업무를 맡아 빈곤 퇴치 사업을 벌였고, 존 린제이 뉴욕 시장을 도와 뉴욕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존 도어는 전통적인 남부 공화당 집안 출신이었고, 스스로를 ‘링컨 공화주의자’라고 부르곤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다시 워싱턴으로 불려와 미 하원 특별검사로 활약했다.(당시 그의 팀원 중 한 명이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74년 7월 닉슨 탄핵안 초안에 존 도어는 이렇게 썼다. “사적으로 나는 닉슨 대통령에 대해 아무 편견이 없고, 그에게 피해를 주고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의 권력 남용 문제에 대해 결코 무심할 수 없다.” 3주 뒤 닉슨은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숱한 인터뷰와 브리핑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어는 단 한 번도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만한 수많은 사연들의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소개하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60년대 법무부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세크라멘토 법대의 도로시 랜즈버그 부학장은 LA타임스 인터뷰에서 “도어는 늘 겸손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었다. 우리가 그를 사랑했고, 그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80년대 고향 미니에폴리스로 돌아가 그의 아들이 운영하는 로펌에서 주로 인권 사건을 맡아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85년 PBS가 만든 50`60년대 시민권운동 특집 시리즈에 인터뷰이로 등장한 도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는 혁명이나 전쟁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통해 카스트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느꼈던 바, 당시 그 현장에는 언제나 강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법에 근거한 민주적이고 헌법적인 절차들을 완성해냈다.”

2012년 메달 수여식 후 케이블방송 C-SPA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1960년대 이후 인종 평등을 위해 전진해온 모든 노력의 놀라운 결실”이라고 말했다. “당시 셀 수 없이 많은 남부의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2등 시민이었고, 차별은 잔혹하고 끔찍했다. 이제 끝났다.”

그는 11월 11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공식자료를 통해 “그의 용기와 인내가 없었다면 미셸과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애도했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는 그의 말은 ‘진단’이 아니라 ‘희망’이었다고 해야 한다. 그는 미주리 주 퍼거슨 사건에 대한 대배심의 불기소 판결(11월 24일)과 이후의 상황들을 보지 못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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