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글로벌내친구]<8>후춘화, 중국을 이끌어갈 준비된 지도자

알림

[글로벌내친구]<8>후춘화, 중국을 이끌어갈 준비된 지도자

입력
2018.05.18 19:00
20면
0 0

소수민족 품은 사명감

배려ㆍ경청의 인품

미ㆍ중 화해 중책 맡아

강원지사를 지낸 이광재(오른쪽) 여시재 원장이 후춘화 중국 국무원 부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후춘화 부총리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꾸준히 주목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광재 여시재 원장 제공
강원지사를 지낸 이광재(오른쪽) 여시재 원장이 후춘화 중국 국무원 부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후춘화 부총리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꾸준히 주목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광재 여시재 원장 제공

지난해 말 열린 19차 중국 당대회에서 7인 상무위원(중국 최고 지도부) 중 1인이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를 두고 내외신의 화제가 된 인물이 있다. 부자도 가장 많고, 가난한 사람도 가장 많다는 광둥성(廣東省)을 이끄는 후춘화(胡春华) 서기였다. 후 서기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세간의 주목을 꾸준히 받던 인물이라 그의 거취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후 서기를 13년 이상 만나 온 필자도 매우 궁금했다.

당시 중국의 고위직을 지닌 원로 한 분을 만났을 때 “후 서기가 어찌 될까요?”라고 물어 봤다. “앞으로 기회가 많겠지요. 중국은 젊은 지도자를 발탁하고 키워 나가는 전통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상무위원이 안 되는구나, 그러나 기회는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대로 후 서기는 19차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이 되질 못했다. 광둥성 서기직마저 떠나게 됐다. 그러자 이제는 정 반대로 후 서기가 재기가 어려울 것이란 얘기마저 돌았다.

그러나 후 서기는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부총리로 화려하게 다시 등장했다. 첫인상부터 지금까지 10년 이상 꾸준히 지켜본 필자에게 후 부총리는 김치를 좋아하고, 항상 웃는 지도자로 기억된다. 후 부총리는 만나는 사람 한 명 한 명에 대해 호의와 관심을 보이고 말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질문을 하고 의견을 구한다. 보통의 지도자들은 자기 말을 하느라 바쁘지만, 그는 경청하는 지도자이다.

후 부총리와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의 여야 정치인 그리고 경제인들과 함께 자리를 꾸준히 만들어 왔다. 후 부총리를 만나본 한국 분들은 “온화하고 여유 있어서 좋다. 사람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경청할 줄 안다”는 한결같은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일할 때만큼은, 매섭고 강철 같은 인물이다.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다. 후 부총리를 만나기 전에 그의 이력을 담은 자료를 먼저 보게 됐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출중한 학생이었다. 대략 50만명 중 1등을 해야 입학이 가능한 베이징대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중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엘리트 중 엘리트였지만 그는 좋은 직장으로 가지 않았다. 가장 살기가 척박한 곳 중에 하나인 티베트 근무를 강력하게 신청했다.

당시 후 부총리는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다. 소수민족자치구는 전 국토의 60%를 차지하며 대부분 국경지대이다. 소수민족 지구는 크게 할 일이 많은 곳이다”라며 티베트행을 결단했다. 티베트에서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탄탄하게 성장해 갔다. 그는 중국 고위직 지도자 중 티베트어를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스무 살에 성공과 안정된 길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사명을 찾아 나섰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티베트 이후 행보도 이채롭다. 그는 43세에 최연소 장관직인 공청단 서기, 허베이성(河北省) 대리 성장을 역임한 뒤, 다시 소수민족이 있는 내몽골(內蒙古) 서기를 했다. 후 부총리가 내몽골 서기를 할 당시 내몽골을 방문한 적이 있다. 처음에 의아했지만, 막상 가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몽골은 소수민족 거주지인 동시에 당시 경제성장률이 연 12% 이상으로 중국 전국 최고였다.

중국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척박한 소수민족에 대한 이해와 경제를 이끄는 경험과 안목을 동시에 성장시킬 수 있는 곳이었던 셈이다. 인재를 발탁하고 체계적으로 키워 나가는 중국 지도부의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후 부총리의 다음 근무지는 중국혁신 경제의 심장이라 불리는 선전(深圳)이 있는, 인구 1억3,000만명의 경제 1위 광둥성 서기였다.

한국보다 큰 단위의 성의 경제를 운용했던 후 부총리는 특히 수치에 강하다. 업무와 관련된 이런 저런 얘기를 해 보면 수치를 줄줄 꿰뚫고 있다. 경제 관련 각종 사례나 예시를 들 때 반드시 수치가 동반된다. 설득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도자는 수치에 강해야 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말이 실감났다.

후 부총리가 이번에 맡은 역할은 3농, 빈부문제 해결이다. 그런데 유의해 볼 만한 일이 생겼다. 미중 간의 무역 전쟁이 한창인 이때에 후 부총리가 오는 11월 5일 열리는 ‘제1회 수입무역박람회’ 준비 주임이 된 것이다. 2020년에는 중국이 세계 최대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 될 행사다. 시 주석은 이번 박람회에 대해 지난 4월 보아오포럼에서 “제1회 수입무역박람회는 중국이 시장을 개방하겠다는 중대한 정책적 선포와 액션이다. 일반적인 박람회가 아니다” 라고 했다.

결국 이번 박람회는 미중 간의 갈등을 넘어, 전 세계가 화해하고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길이 중국에서 열린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알리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본다. 세계 신(新) 경제 지도가 탄생하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1820년 세계 국내총생산(GDP) 비율을 보면 중국 청나라가 32%, 유럽은 22.5%였다. 그중 영국이 5%였고, 미국은 1.8%이다. 1950년에는 미국 27%, 유럽 26%, 중국 4% 였다. 그러나 다시 중국이 굴기(屈起)하고 있다. 2017년 기준 미국은 24.32%, 중국은 14.84%이다. 문명사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후 부총리에게는 소수민족, 내치를 넘어 세계 질서의 변화에 대응하는 중차대한 책무가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후 부총리의 장래에 대해 추측성 기사들이 많다. 덩샤오핑(鄧小平)의 ‘3기3락(三起三落)’이 생각난다. 3번이나 지독하게 어려웠던 시절을 겪고 오뚝이처럼 우뚝 일어선 것에 대한 비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 “사람의 손바닥에 있는 손금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손금은 하늘이 사람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나타내는 것” 이라 했다. 그런데 3기3락도, 손금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변하는 것 아니겠나.

후 부총리는 늘 말한다. “3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이상, 즉 꿈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일하는 것, 또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후 부총리의 꿈과 이상은 뭘까. 이제 그 앞에 놓인 과제는 미중 갈등을 넘어 미중의 화해, 인류의 공존과 공동의 번영의 길을 여는 것이라 본다. 우리 역시 후 부총리를 통해 중국을 더 깊게 알고, 더 철저히 배우고, 미래를 먼저 내다보고 우리의 대안을 만들어 나갈 때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