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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른 강기정, 눈물의 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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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른 강기정, 눈물의 필리버스터

입력
2016.02.2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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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5일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강기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5일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2월 25일. 3선의 강기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겐 이날이 정치 인생 중 가장 극적인 날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지역구(광주 북갑)를 전략 공천한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에서부터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5시간의 필리버스터까지. 정신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극한의 경험을 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눈물과 작별을 고하는 듯 한 인사, 광주 정신을 대표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등장한 그의 필리버스터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강 의원의 격동적인 하루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필리버스터 준비에 한창이던 오후 2시경 시작됐습니다. 정장선 더민주 총선기획단장이 이날 자신의 지역구(광주 북갑)에 대해 전략 공천을 요청한다는, 사실상 공천배제 소식을 언론을 통해 들었던 것입니다. 발표 소식을 접한 강 의원은 한동안 멍하니 넋이 나갔다는 후문입니다. 다른 지역구 출마는 생각도 하지 않고, 국민의당의 창당에도 끝까지 더민주의 이름으로 광주 지역구를 지켰던 그의 입장에선 배신감이 들만한 소식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강 의원은 “시스템 공천으로는 당의 총선 승리는 없다”는 짧은 공식 대응 멘트만 남기고 의원회관과 국회 본회의장을 오가며 필리버스터 준비에 집중했습니다. 공천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필리버스터를 거부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도, 3선 의원으로서의 정치적 위치와도 맞지 않는다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8시 55분. 자신의 순서가 돌아오자 강 의원은 천천히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습니다. 차분하게 필리버스터를 마무리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올라왔지만, 막상 단상에서 국회 본회의장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강 의원은 깊은 한숨을 내뱉은 후 이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는 “19대 국회에서 국회선진화법이 개정되기 전 본회의장에서 몸싸움을 자주 했다. 그때는 필리버스터 같은 수단이 없으니까 점잖게 싸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국민으로부터 폭력의원이라고 낙인 찍히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을 간신히 이어가면서 연신 눈물을 훔쳤습니다. 개정 국회법이 통과되기 전 여야가 본회의에서 몸싸움을 벌이던 시절, 그는 대표적인 야당의 저돌적인 공격수였습니다. 이날 사실상 공천배제의 시초가 그런 이미지 때문이라 생각이 들면서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 것 같습니다. 안쓰러운 모습에 같은 당 전순옥 의원은 단상까지 직접 찾아와 손수건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강 의원은 자신이 준비한 원고를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2시간가량 낮은 목소리로 준비된 연설을 하던 강 의원은 11시경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당시 사회를 보고 있던 이석현 부의장이 “강 의원이 발언을 한 지 꼭 두 시간이 됐다”면서 “많이 힘이 들 텐데 제가 잠깐 말을 하겠다”고 입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의장은 “강 의원이 평소와는 달리 이렇게 뒷모습을 보니까 참 외로워 보이고 고독해 보인다”며 “아마 마음 속에 응어리가 많이 있을 텐데 이 자리에서 그걸 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고 위로했습니다. 같은 당인 이 부의장이 볼 때 이날 전략공천 소식은 강 의원의 ‘응어리’가 되기 충분해 보였다는 취지였습니다. 이 부의장은 이어 “용기 잃지 마시고 더 열심히 해서 국민으로부터 더 큰 인정을 받고 무엇보다 스스로 양심에 만족할 수 있는 의정 활동 하시기를 바란다”며 재차 그를 격려했습니다. 강 의원은 이 부의장의 배려가 이어지는 동안 잠시 단상에 주저 앉아 다시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추스른 강 의원은 다시 발언을 이어가기 전 본회의장에 앉아 있던 같은 당 동료의원들의 모습을 조용히 응시했습니다. 그리곤 작정한 듯 한 명 한 명 동료 의원들의 이름과 그들의 정치적 중요성 및 개인적 고마움 등을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정세균 더민주 상임고문을 향해 “저를 ‘친노다, 세다, 독선적이다, 폭력적이다’라고 사람들이 말해도 품어주신 정세균 대표가 자리에 계신다”라며 “정 대표님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위원장을 맡으며 여러 방안을 만들어내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전날 더민주의 컷오프 대상에 포함된 문희상ㆍ유인태 의원에 대해선 “국정원에 대해 (당에서) 제일 잘 아시는 분”이라고 추켜세웠고, 이인영 의원은 “우리에게 많은 힘과 기상을 주는 의원이자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을 해치는 노동4법의 배수의 진을 친 마지막 의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이미경ㆍ인재근ㆍ홍영표ㆍ진선미ㆍ김기준ㆍ추미애 의원에 대해서도 자신과의 개인적 추억을 소개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의원 이름을 한 명 한 명을 부를 때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기도 했으며, 표정 역시 회한이 가득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의 발언은 퇴임사를 연상시키기 충분할 만한 상황이었던 셈입니다.

강 의원의 필리버스터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강 의원은 마무리 발언을 통해 “이 자리가 몸싸움했던 자리가 아닌, 날을 새가면서 토론할 수 있었던 자리가 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소회를 말한 뒤, “제가 꼭 한 번 이 자리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밝혔습니다. 국회법상 필리버스터와 관련 없는 발언은 본회의에서 금지돼 있지만, 당시 사회를 보던 정갑윤 국회 부의장은 제지 하지 않았습니다. 이내 넓은 국회 본회의장엔 그의 노래 소리가 울렸고, 노래를 마친 강 의원은 단상을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로 “(필리버스터에) 나와줘서 고맙다. 사랑한다”는, 당은 다르지만 12년 동안 함께 의정활동을 한 정 부의장의 말이 배웅 인사처럼 깔렸습니다.

강 의원은 필리버스터 이후 26일 오후까지 특별한 움직임 없이 장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민의 시간만큼 그의 필리버스터가 정치적 작별 인사였는지, 또 다른 결정을 위한 쉼표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져 갈 것입니다. 더민주의 핵심 관계자는 “강 의원에 대한 당내 동정 여론이 서서히 힘을 받고 있다”며 “어떤 결론을 내든지 힘차고 강직한 그의 본래 모습으로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정재호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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