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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이병훈 PD를 작가들이 떠난 이유

입력
2016.05.2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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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주말 사극 '옥중화'를 연출하고 있는 이병훈 PD. 한국일보 자료사진
MBC 주말 사극 '옥중화'를 연출하고 있는 이병훈 PD.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내 최고령 드라마 PD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MBC 주말 사극 ‘옥중화’를 연출하고 있는 ‘사극 명장’ 이병훈(72) PD입니다. 2013년 방송된 ‘마의’ 후 3년 만의 복귀죠. 눈에 띄는 건 복귀 파트너였습니다. 최완규 작가와 14년 만에 손을 잡고 ‘옥중화’ 제작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허준’(2000)과 ‘상도’(2002)를 끝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이 PD의 그늘을 벗어난 최 작가는 ‘올인’(2003)과 ‘주몽’(2007)을 성공시키며 스타 작가로 성장했죠. 각자의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손을 잡게 됐을까요.

최근 만난 이 PD에 따르면 최 작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답니다. “새 작품을 해야 하는데 힘들더라도 같이 하는 게 어떻겠느냐”면서. 이 PD도 바라던 바였습니다. 신인 작가와 드라마를 꾸리기엔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너무 힘에 부쳤기 때문입니다. 이 PD의 말을 듣다 보니 “힘들더라도”란 말이 귀에 꽂혔습니다. 도대체 이 PD랑 드라마를 찍는 일이 작가들에게는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까요. 이 PD가 농담을 섞어 옛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 ‘상도’ 끝나고 최완규씨에게 드라마 하자고 하니까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이 국장님과 작품 하면 ‘내 만수무강에 지장이 있다’면서요. 그렇게 최완규씨는 항상 도망 다녔죠, 하하하.”

돌이켜 보니 이 PD의 말대로 그에게서 “도망간” 작가가 또 있었습니다. 김영현 작가도 ‘대장금’(2004)과 ‘서동요’(2006)를 끝으로 이 PD와 작품을 하지 않았습니다. 김이영 작가도 ‘이산’(2007)과 ‘동이’(2010)를 끝낸 뒤 “너무 고달프다”며 이 PD와의 새 사극 작업을 고사하다 ‘마의’(2013)까지 했다고 합니다. ‘마의’를 끝낸 김 작가는 결국 ‘화정’(2015)으로 새 길을 갔죠.

이 PD는 꼼꼼하기로 정평이 난 연출자입니다. 최근 경기 용인 MBC드라미아의 ‘옥중화’ 촬영장에 가보니, 그는 극중 조연들만 나오는 한 장면을 약 한 시간 동안 찍고 있었습니다. 배우들의 몸짓뿐 아니라 대사 처리까지 다 지도했습니다. 이 PD는 촬영 중 “아가씨”란 대사 한마디를 두고 종금 역을 맡은 이잎새 등 배우들에게 조선시대 호칭에 대한 설명까지 했습니다. 현장에서 이렇게 작은 것까지 챙기는 이 PD는 드라마 소재 등 뼈대도 작가와 함께 짭니다. 주문사항도 많다고 합니다. 50부작 자체가 고되고 긴 여정인데, 이 PD가 워낙 꼼꼼하게 작품을 챙기다 보니 함께 하는 작가 입장에서는 버거운 일이 되는 겁니다.

이병훈 감독과 드라마 작업을 했던 김영현 작가('대장금', 왼쪽부터)와 김이영 작가('이산') 그리고 최완규 작가('옥중화'). MBC 제공
이병훈 감독과 드라마 작업을 했던 김영현 작가('대장금', 왼쪽부터)와 김이영 작가('이산') 그리고 최완규 작가('옥중화'). MBC 제공

이 PD는 “교육적 가치” 때문에 사극에서 고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꼼꼼하게 이야기를 살피고, 주인공도 재미를 넘어 TV를 통해 소개해 줄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인물인지를 따집니다. 이 PD가 무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극을 찍지 않는 이유입니다. 무녀가 국가의 운을 점치며 ‘음지의 권력’으로 주목 받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무녀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무녀에 극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지금의 여성 시청자들에게 공감대를 줄 수 없는 직업군이라는 게 이 PD의 생각입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하고, 시청자들의 현실적인 욕망까지 만족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성이 지배하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의 사극에 의술(‘대장금’)을 하고, 약자 변호(‘옥중화)를 하는 여성들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PD가 교과서 같은 연출자는 아닙니다. 그의 사극을 보면 전업 배우가 아닌 인물이 나와 극에 흥을 줍니다. ‘옥중화’에선 남성 힙합 듀오 마이티마우스 멤버인 쇼리가 소매치기 천둥 역으로 나옵니다. 래퍼의 정통 사극 출연이라니요. 이 PD는 “비극 속엔 희극이 있어야 한다”며 쇼리를 섭외한 사연을 들려줬습니다.

‘옥중화’는 조선시대 감옥을 배경으로 그 곳에서 태어난 옥녀(진세연)의 복수가 주제입니다. 틀 자체가 어둡고 무거운 만큼 시청자들에게 뜬금없는 웃음으로 숨통을 틔워주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PD는 “드라마에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다가 지인에게서 쇼리를 추천 받았고, 오디션을 통해 그를 발탁했습니다. 쇼리와 함께 개그맨 이봉원도 드라마에 포도부장 양동구로 캐스팅했습니다. ‘대장금’에서는 개그맨 지상렬을 섭외해 극에 재미를 준 바 있습니다.

이런 엉뚱함은 이 PD의 성장과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1970년 MBC 공채 2기 PD로 입사한 그는 ‘문제아’로 통했습니다. 입사 첫 해 부산MBC에 보내야 할 필름을 다른 곳으로 잘못 보내 편성국에서 쫓겨났죠. 제작국으로 발령 받은 뒤에는 성우였던 아내와 연애를 하다 드라마를 소위 ‘말아먹기도’ 했답니다. 하루에 두 번씩 만나며 데이트를 하다 촬영에 그만큼 소홀했기 때문이죠. 이런 ‘흑역사’가 되레 드라마 속의 자연스러운 유머로 빛을 발하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20년 넘게 사극만 했다고 유행에 둔감한 ‘할배’도 아니었습니다. 이 PD는 최근 “‘치인트’를 재미있게 봤다”고 했습니다. MBC의 까마득한 후배인 이윤정 PD가 CJ E&M으로 이적해 연출한 ‘치즈 인 더 트랩’ 얘기입니다. 40대인 기자가 극 초반 풋풋한 대학생들의 연애담이 ‘닭살’스러워 적응하지 못했던 드라마입니다. 이 PD는 “드라마를 감각적으로 연출해 윤정이한테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김은희 작가가 쓴 tvN ‘시그널’을 비롯해 김영현·박상현 작가가 쓴 SBS ‘육룡이 나르샤’도 챙겨 봤답니다. ‘육룡이 나르샤’를 보던 이 PD는 극중 화려한 무술 장면에 반해 무술 감독을 직접 ‘옥중화’에 섭외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여러 작품을 보며 자신의 작품에 녹일 소재나 그림 등을 고민한다는 뜻입니다.

이 PD는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도 ‘♥’ 같은 이모티콘을 빼 먹지 않습니다. 배우뿐 아니라 기자와 문자를 주고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PD가 사극에서 현대적인 대사를 고집하는 것도 젊은 시청자와 소통하기 위해섭니다. 이 PD는 궁중용어를 제외하곤 사가에서 진행되는 대사는 현대어를 씁니다. 이로 인해 극중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 역을 맡은 배우 정준호는 캐릭터의 방향을 새로 짜기도 했답니다. 사극에 맞는 캐릭터와 대사 톤 연구를 해왔는데, 이 PD가 영화 ‘베테랑’ 속 안하무인 재벌2세 조태오 같은 느낌을 주문해서입니다. 극 초반 사극 속 캐릭터와 현대적인 말투가 겉돌아 어색하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사극의 현대성을 위해 이 PD가 고수하는 제작 원칙입니다.

드라마의 한 관계자는 이 PD를 “사극판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부르더군요.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을 만든 미야자키처럼 여성을 모험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작품에 인간적인 따뜻함이 묻어난다면서요. ‘MBC 문제아’에서 ‘사극명장’이 된 이 PD의 사극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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