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동안 열차를 운전하고 있는 철도 기관사가 열차의 창에 비친 근대사 책을 썼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 근무하는 박흥수(49)씨의 책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후마니타스 발행)는 철도를 따라 떠나는 세계사 여행, 운행 구간은 근대다.
그는 소문난 ‘철도 덕후’다. 책날개에 쓰기를, 만사 ‘기-승-전-철도’로 살다 보니 조금 더 미친다면 아무라도 붙잡고 혹시 “철‘도’를 아십니까?”라고 접근할지도 모른다고 했을 정도. 철도사고, 철도파업 등 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해 온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 연구위원이기도 하다. 이번이 두 번째 책이다. 전작 ‘철도의 눈물’(2013)에서는 철도 민영화 계획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철도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근대가 철도와 함께 시작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철도로 본 역사책은 거의 없다. 그는 “근대의 여러 역사적 사실과 장면을 철도라는 실로 엮어서 다른 시각으로 보려고 했어요. 역사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철도가 아니라 열차의 창에 비친 근대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일단 재미있다. 전체 7부 중 고대 운송수단에서 철도의 기원을 찾아보는 1부는 워밍업. 증기기관차의 탄생으로 근대가 개막하는 18세기 영국을 다룬 2부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당시 열린 기관차 경주대회를 해설자 마르크스 선생을 모시고 작가 찰스 디킨스가 진행하는 중계방송 형식으로 쓴 대목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진지하다. 철도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 서양과 한국,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썼다. 산업혁명, 영국 노동당의 탄생, 프랑스혁명, 미국의 남북전쟁과 아메리칸 드림, 일본 제국주의, 1ㆍ2차 세계대전을 지나 한국전쟁을 다룬 마지막 7부까지 따라가다 보면 철도가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흥미로운 장면들을 잡아 냈다. 예컨대 영국 노동당, 19세기 인상주의 그림, 주식회사와 로비스트, 산업 카르텔 탄생의 중심에 철도가 있었다. 미국 링컨 대통령은 철도 전문 변호사였고, 남북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도 철도다. 미 대륙횡단 열차를 건설하는 과정에 뿌려진 중국인 이민 노동자와 원주민들의 피와 눈물,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보급품과 병력 운송을 방해하는 지연 작전과 철도 파괴로 맞선 레지스탕스와 철도 노동자들, 기차역에서 내리면 바로 가스실이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등. 한국의 근대로 눈을 돌리면 일제의 조선 침탈과 만주 침략, 해방 후 미군정 치하의 1946년 전국 총파업, 한국전쟁의 주요 장면에도 철도가 빠지지 않는다.
철도 기관사는 근무시간이 매우 불규칙하다. 현재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를 운전하는 그가 보여준 근무표는 난수표에 가까웠다. 출퇴근 시간이 매일 다르다. 그것도 3개월마다 통째로 바뀐다. 쉬는 날은 뒤죽박죽이고 노동 강도 역시 엄청 세다. 그런데도 책을 썼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정쩡한 시간에 퇴근할 때마다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오늘은 뭘 읽으면 좋을까 공룡처럼 서가를 어슬렁거리면서. 집은 거의 헌책방이란다. 그의 취미는 ‘외계인 걷기’. “차를 타고 가다 아무 데나 내려서 걸어요. 이 행성에 처음 도착한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새롭게 다가오면서 아주 재미있죠.” 책을 쓴 내공이 그런 호기심에서 길러졌음을 알겠다.
종종 한국전쟁 중 미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인 노근리 굴다리 위로 열차를 몰고 갈 때마다 당시 두려움에 떨며 죽어간 아이들을 생각한다는 박흥수씨. 그의 꿈은 남북 통일 그 날이 오면 남북 아이들이 탄 열차 맨 앞 기관차에서 신나게 기적을 울리는 것이다. “과거의 철도가 비극과 눈물의 기차라면, 미래의 기차는 희망과 평화의 철도였으면 좋겠어요.”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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