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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의 시 한 송이] 페인트

입력
2017.07.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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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리고 내가 가끔은 너라고 부르는 나도 책상은 아니에요. 다만 책상처럼 앉아 있었던 것이에요. 우두커니. 하염없이. 앉아있는 고체에서 흘러내리는 액체의 감각. 나로부터 내가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진득진득해요.

페인트는 위장의 대가죠. 색색의 무장해제 속에 얼룩도 철계단의 녹도 감추죠. 나만의 문 하나쯤은 가져야 하는데, 단 하나의 문마저도 남의 것인 나는 페인트가 될 수밖에 없죠. 아니 페인트도 못되고 페인트처럼 되어가니, 더 많은 방을 더 많은 문을 만들 수밖에 없죠. 그것이 아니라 그것처럼. 존재 자체는 없고 비유의 자세가 되어갈수록 고립되고 싶어도 고립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자꾸자꾸 흘러내릴 수밖에요.

페인트의 마술로 말끔해졌어요. 역시 문 하나 없는 새로운 세입자가 오기 전에 나는 떠나요. 아주 좋은 곳으로 고쳐진, 페인트가 칠해진 집에 들어오는 세입자도 이곳을 떠날 때쯤 되면 떠나온 방들의 기억이 떠오를 거예요. 책상처럼 우두커니 앉아 페인트처럼 흘러내리던 순간들. 그리고 몇 년 간 지낸 이곳에는 이전 세입자의 흘러내린 ‘처럼의 감각’도 섞여 있다는 것.

확장시키면 우리는 모두 세입자인 셈이지요. 이런 비유는 느슨하고 모범적이지만 내 집, 우리 집, 우리들의 집, 인간의 발명품인 페인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이런 번짐의 경쾌함이지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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