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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에 맞선 ‘민주화 운동 거목' 박형규 목사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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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에 맞선 ‘민주화 운동 거목' 박형규 목사 별세

입력
2016.08.1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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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목사는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자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한국사회의 핵심 담론을 이끌어 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형규 목사는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이자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한국사회의 핵심 담론을 이끌어 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민주화 운동의 거목으로 ‘행동하는 신앙인’, ‘길 위의 목사’로 불린 박형규 목사가 18일 오후 5시 30분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 부산대 철학과를 중퇴하고, 유학길에 올라 1959년 일본 동경신학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59년 4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공덕교회 부목사로 부임해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대에서 수학했다.

평범한 목회자로 살아가던 고인의 운명을 바뀐 것은 1960년 4월 19일부터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서던 길에 독재정부 탄압으로 피 흘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불의한 시대에 항거하기로 결심했던 것. 고인은 “들것에 실린 피 흘리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고, 여러 날을 충격 속에서 살았다”며 “값싼 복음을 파는 목회를 청산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에 나를 바치기로 맹세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후 굵직한 주요 항거를 이끌다 국가내란예비음모, 긴급조치 및 집시법 위반 혐의 등으로 6번에 걸쳐 투옥됐지만 “이런 시대에 성직자가 감옥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1973년 4월 이른바 '남산 부활절 사건'으로 당시 기독교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플래카드와 전단을 배포하려다 실패한 뒤 '내란예비음모죄'로 기소됐고, 1974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38년 뒤인 2012년에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억울함을 풀었다. 1978년 2월에는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새 민주헌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3.1 민주선언'을 발표했다가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하며 정권은 늘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고 전두환 정권은 고인이 이끌던 서울제일교회 교인을 협박, 폭행하는 등 예배방해까지 자행했다. 나흘간 감금돼 살해 위협을 받은 고인은 결국 6년간 길거리에서 노상예배를 이어갔다. 이 ‘길 위의 목사’가 이끈 노상예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되레 민주화 운동의 한 터전으로 자리잡아 한국 사회 핵심 과제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마당으로 기능했다.

1971년~1992년 서울 제일교회를 이끌었고 198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 1982~1991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이사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1992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고문, 1995년 노동인권회관 이사장을 지냈으며 2002~200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해방의 길목에서', '해방을 향한 순례', '파수꾼의 함성', '행동하는 신학 실천하는 신앙인',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특실, 발인은 22일이다. (02)2072-2020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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