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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왕자비에서 네팔의 자선ㆍ인권운동가로

입력
2016.05.14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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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바버라 애덤스

바버라 애덤스는 미국 뉴욕서 태어나 50여 년을 네팔에서 살다 거기서 생을 마쳤다. 은둔의 오지에서 각광받는 관광지로, 전제군주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급변해 온 그 세월 동안 애덤스도 왕자의 반려에서 추방자로, 또 민주주의 활동가이자 자선 사업가로 변모해갔다. 바버라평화재단 홈페이지 barbarapeacefoundation.org
바버라 애덤스는 미국 뉴욕서 태어나 50여 년을 네팔에서 살다 거기서 생을 마쳤다. 은둔의 오지에서 각광받는 관광지로, 전제군주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급변해 온 그 세월 동안 애덤스도 왕자의 반려에서 추방자로, 또 민주주의 활동가이자 자선 사업가로 변모해갔다. 바버라평화재단 홈페이지 barbarapeacefoundation.org

1931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2016년 네팔 카트만두에서 생을 마친 바버라 애덤스(Barbara Adams)는 저 두 도시 공간이미지의 격차만큼이나 출렁이는 삶을 살았다.

그는 20대의 근 10년 동안 세상을 떠돌다 운명처럼 네팔 왕자(엄밀히는 王弟ㆍ왕제)를 만나 16년간 왕자비로 지냈고, 80~90년대 두 차례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는 한사코 네팔로 되돌아갔고 근 30년을 애쓴 끝에 네팔 국적을 얻어냈다. 지난 50여 년 사이 네팔은 상전벽해라 해야 할 변화를 겪었다. 은둔의 전제왕정은 입헌군주정으로 민주공화정으로 바뀌었고, 사철 외지인으로 붐비는 세계적 관광 트레킹 명소가 됐다. 도시의 풍경과 환경이, 사람이, 문화와 풍습과 가치관이 따라 바뀌었고, 그 자신 한 때 저 변화의 엔진이기도 했던 애덤스의 처지와 생각도 더불어 달라져갔다. 왕가의 일원이던 그는, 내부 참여자이자 외부 관찰자로서, 그 과정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저널리스트가 됐고, 말년에는 네팔 민주주의와 빈민 인권ㆍ복지를 위해 살았다. 달라지지 않은 한 가지, 처음처럼 늘 네팔을 사랑했다는 그가 4월 22일 별세했다. 향년 84세.

애덤스는 1931년 4월 24일 맨해튼에서 태어나 워싱턴D.C.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루스벨트 정부에서 뉴딜정책을 다루던 고위 경제관료였다. 어린 그는 반항기 많은 말썽쟁이였던 듯하다. 학교 결석은 다반사였고, 친구들보단 말 목장에서 말과 노는 게 좋았다고 한다. 냉전의 1940년대는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가 미국 사회를 지배했고, 중ㆍ상류층 아이들은 그룹 과외수업을 받듯이 전시 구난법ㆍ생존법을 배우곤 했다. 그 커리큘럼 중에 12살의 애덤스를 매료시킨 게 말타기였다.(sportlightnepal.com, 2011.1.7)

고교를 중퇴했지만 어찌어찌 조지워싱턴대에 진학했고, 콜럼비아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고 한다.(워싱턴포스트) 하지만 훗날 출간한 그의 책 <바버라의 네팔>에는 그가 조지타운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며 불어와 러시아어를 익혔고, 조지워싱턴대에서는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고 나와있다. 그는 어학과 문학, 특히 글쓰기를 좋아했고, 중년 무렵엔 네팔어에도 능통해 현지 여러 신문에 영어와 네팔어로 칼럼을 썼다.

그는 대학을 마치자마자 방랑을 시작했다. 이탈리아 로마에 주로 머물며 유럽과 중동, 인도 등지를 여행했다. 로마에서 한 외교관 자녀의 영어 가정교사 일을 잠깐 했지만, 주업은 프리랜스 기자였다. 일로 여러 나라를 다녔고, 그렇게 번 돈으로 또 여행을 했다. 2010년 한 인터뷰에선 이집트 애스원댐 기공식(1960)을 취재하며 나세르와 흐루시쵸프 가까이 서 있었던 적도 있다고 자랑했다.

베트남-필리핀- 일본으로 이어질 참이던 그의 여정이 네팔서 멈춘 건 1961년이었다. 그 무렵 이탈리아 주간지 ‘Mundo Nuova 세계 뉴스’와 계약해 인도를 취재하던 그는 그 해 2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네팔 방문기 취재차 입국했다. 당시 네팔은 오지 중의 오지였고, 그가 간신히 입국했을 땐 여왕이 떠난 뒤였다고 한다. 하지만 네팔의 비경은 취재 실패를 보상하고도 넘칠 만큼 황홀했다. “당시 카트만두는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아주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었어요. 길에 쓰레기봉지 같은 것도 볼 수 없었는데, 아예 살 게 없었기 때문이었죠. 푸른 언덕과 눈 덮인 산봉우리들, 몇 채의 블록 집들, 말 그대로 ‘샹그리라’였어요.”(spotlightnepal, 위 기사)

눌러 앉고 싶던 그를 눌러 앉힌 건 호텔 바에서 만난 왕자 바순다라(Bhasundhara, 1921~1977)였다. 그가 먼저 애덤스에게 말을 건넸고, 서로의 기질과 관심사를 확인한 뒤 바순다라가 자신의 히말라야 등반 사진들을 보여주며 애덤스의 마음을 샀고…. 그는 잘생기고 신사적이고 또 부유한 왕족이었다. 전제 군주 마헨드라(Mahendra, 1920~1972)의 배다른 동생인 그는 실권은 없었지만 책임도 없었고, 간섭 없이 쓸 수 있는 돈과 시간은 무한하다 할 만큼 풍족하고 개방적이기까지 한 한량이었다. 네팔 시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왕족으로 꼽히던 그의 당시 직함은 네팔골프클럽 회장, 국립스포츠위원회 의장. 술과 친구와 여행과 모험이라면 사족을 못 썼고, 바람둥이이기도 해서 45년 결혼해 세 딸을 낳은 아내와 7년째 별거 중이었다. 스스로는 자유롭다 여겼던 바순다라는 푸른 눈의 금발 미녀 애덤스와 곧장 일본- 홍콩으로 호사스러운 여행을 다녀왔고, 그 길로 동거를 시작했다. 훗날 애덤스는 “(그를 선택하기 위해) 내 옛 삶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는 내 과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AP, 2006.11.12) 애덤스는 금세 네팔의 유명인이 됐지만, 미국의 가족에겐 실종자가 됐다.

걷고, 말 타고, 코끼리도 타고, 때로는 자동차로, 둘은 네팔 부탄 티벳 등 히말라야의 오지란 오지는 다 누비고 다닌다. 지금도 ‘금단의 왕국’이라 불리는 네팔 북쪽 티벳 국경의 무스탕(Mustang)을 공식적으로 여행(탐사)한 게 63년. 애덤스는 그 곳을 탐사한 첫 외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인 말곤 외국인이라곤 본 적이 없던 당시 무스탕 주민들이 바지를 입고 티벳 남자들처럼 머리를 기른 애덤스의 성별조차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실종된 딸을 찾아 당시 미 국무부에 근무하던 조카를 보낸 게 그 무렵이었다. 믿기지 않지만 그들이 네팔과 인도 국경 근처 테라이(Terai)라는 평원지역에서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조우했을 때, 그와 바순다라는 코끼리를 타고 여행 중이었다. “웬 지프 한 대가 나타났어요. 사흘 만에 처음 본 차였는데, 조카 웨슬리(Wesley)가 타고 있더군요. 내가 리빙스턴(19세기 아프리카 탐험가)이 된 듯한 순간이었죠.”

그와 바순다라는 62년 네팔 최초의 여행사 ‘Third Eye Tours & Travels’를 설립했다. 부부는 유럽과 미국을 돌며 네팔을 소개하는 컨퍼런스를 열었다. 애덤스의 저널리스트 이력과 네트워크가 빛을 발했다. 네팔 관광이 본격화한 것은 교통 사정이 나아진 80년대였지만, 특별한 소수가 네팔에 열광하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다. 당시 네팔은 해시시 코카인에 관대했다. 훗날 애덤스는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PATA)의 ‘아시아 관광 개척자상’을 탔다.

둘은 보수적이던 궁정 행사 외에는 부부처럼 공식 행사에 참석하곤 했다. “바순다라는 (힌두의 보수적 왕가 사람들과 달리) 매우 근대적이어서 왕궁행사를 기피했는데, 마침 내가 좋은 핑계거리가 됐던 것 같다”고 애덤스는 말했다. 당시 둘의 거처는 현재 일본 대사관저로 쓰이는 카트만두 타하첼(Tahachel)의 미로 같은 궁전이었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때면, 친구들을 초대해 호사스런 파티를 벌이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1972년 마헨드라 왕이 숨졌다. 55년 즉위한 그는 59년 신헌법을 공포한 입헌군주로 네팔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치러 네팔의회당의 B.P 코이라라(Bishweshwar Prasad Koirala, 1914~1982) 내각 체제를 출범시켰지만, 이듬해 정당과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군주제로 회귀했다. 마헨드라는 국왕 자문기관이나 다름없는 정당 없는 의회 ‘판차야트(panchayat)’를 구성해 입법권까지 장악했고, 그 체제는 마헨드라의 장남 비렌드라(Birendra) 국왕이 집권한 이후, 1990년 2월의 대규모 민중 저항으로 입헌군주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이어졌다. 애덤스가 입국할 당시 반체제 정치인 코이라라는 투옥된 상태였다.

비렌드라는 2001년 코카인 중독자였던 왕세자에 의해 살해됐고, 이어 집권한 비렌드라의 동생 갸넨드라(Gyanendra)는 전제왕정 부활을 꾀하다 실패해 2007년 실각했다. 앞서 1950년 티벳을 점령한 중국은 네팔을 사이에 두고 인도와 군사적 긴장관계를 지속했고, 90년대 무렵부터는 마오주의 반군과 네팔 국민군과의 내전이 지속되면서 정정 혼란이 극심했다. 네팔의 정치적 격변은 2007년 말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네팔 연방민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진정됐으나 정치 부패와 혼란은 이후로도 지속됐다.

77년 바순다라가 숨진 뒤 사실혼 관계의 왕자비 애덤스에 대한 왕실의 경계와 푸대접이 심해졌다. 바순다라와 함께 운영하던 여행사는 왕실에 빼앗겼고, 애덤스는 바순다라가 준 장신구와 네팔 수공예품을 해외에 내다팔며 생활을 이어갔다. 80년대 이후 관광이 활성화하면서 외국인 장기체류자들이 증가했다. 그들 다수는 마약 상용자였고, 네팔의 억압적 전제체제에도 사뭇 비판적이었다. 88년 비렌드라 왕실은 그 전까지 방치하던 외국인 장기체류를 선별적으로 허가하는 법을 제정했다. 마헨드라의 아버지 트리부반 국왕이 1951년 쇄국의 빗장을 연 지 근 40년 만이었다. 애덤스의 추방도 불가피해졌다. 당시 서방 외교관들은 그 법의 주 타깃이 애덤스여서 ‘애덤스 로(Adams Law)’라 불렀다고 한다.(LA타임스, 1990.3.2) LA타임스 인터뷰에서 애덤스는 “왕실은 너무 많은 것을 아는 사람들을 치워버리고 싶어했던 듯하다. 그들은 서방의 경제 원조는 원했지만, 정치ㆍ사회적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사상의 유입은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생계의 방편으로 여행 기사를 주로 쓰던 애덤스가 ‘The Independent’ ‘kathmandu Post’ ‘Everest Herald’등 여러 지역 언론에 네팔의 환경문제와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칼럼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2000년 입헌군주정 당시에도 애덤스는 추방된 적이 있지만, 그는 여건이 호전되기 무섭게 네팔로 되돌아오곤 했다. 사실 애덤스는 바순다라가 숨진 직후부터 추방될 가능성을 염려해 네팔 국적을 얻으려 했지만 매번 거부당했다. 그가 네팔 국적을 획득한 것은 공화정이 들어선 직후인 2009년 2월이었다. 당시 한 지역신문은 매년 수 천명의 네팔 시민이 미국으로 이민 못 가 야단인데 애덤스는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 못 돼 안달이었다고 썼다.

바순다라와 함께 지내던 60년대, 애덤스는 부탄 왕실로부터 전통 텍스타일(Textile) 선물을 받고 거기 매료돼 부탄의 오래된 태피스트리나 카페트만 보면 기를 쓰고 사 모았다고 한다. 그가 좋은 값에 사들인다는 소문이 나자 팔려고 찾아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여유 없던 시절에도 장신구를 팔아가며 사 모은 게 300여 점에 달했다. 1984년 애덤스는 첫 책 <부탄의 텍스타일>을 인도에서 출간, 그 예술적 가치를 처음 세상에 알렸다. 2001년 8월 부탄 왕실이 국립 텍스타일 박물관을 건립하려다 국보급 공예품들이 죄다 팔려 나가 난감해한다는 소식을 한 프리랜스 기자가 자신의 개인 저널에 보도했다. 그걸 본 스위스 제약업체 페링사의 CEO이자 자선사업가 프레드릭 파울슨이 수소문 끝에 애덤스를 찾아 그의 물건들을 50만 달러에 몽땅 사들인 뒤 부탄 왕실에 기증했다. 2003년 12월 월스트리트저널은 파울슨의 미담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기사는 “파울슨 씨가 그 물건들을 부탄으로 되돌려 보려는 게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그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애덤스의 말과 함께 “애덤스는 만만찮은 협상가였다”는 파울슨의 말도 덧붙였다.

네팔 카스트 최하층민 달리츠(Dalits)의 움막. 바버라는 그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농사지을 땅과 기술을 전하는 일을 해왔다. 재단 홈페이지.
네팔 카스트 최하층민 달리츠(Dalits)의 움막. 바버라는 그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농사지을 땅과 기술을 전하는 일을 해왔다. 재단 홈페이지.
바버라평화재단의 주력 사업 가운데 하나인 ‘네팔청년개척자(YVN)’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교육을 받는 모습이다. 재단 홈페이지.
바버라평화재단의 주력 사업 가운데 하나인 ‘네팔청년개척자(YVN)’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교육을 받는 모습이다. 재단 홈페이지.

만년의 애덤스는 그 돈으로 뜻 맞는 지인들과 ‘바버라평화재단 Barbara Peace Foundation’을 설립, 네팔 민주화와 환경ㆍ빈민 교육ㆍ구제사업에 헌신했다. 네팔 메가은행 등과 함께 ‘반부패상 Anti-Corruption Prize’을 제정해 정부기관의 부패 사례를 추적 보도한 언론인에게 매년 상을 수여해왔고, 2011년부터는 ‘네팔청년개척자(YVN)’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자원자를 모집해 지역 개발 및 자활 교육을 이수케 한 뒤 1년간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자립자금으로 15만 루피(약 165만원)를 지급하는 프로그램. 청년의 해외 유출과 오지 생활여건 개선을 위한 거였다. 재단은 힌두 카스트의 최하층민 달리츠(Dalits) 공동체에 집을 지어주는 사업도 벌여왔다. 네팔 서부 끄트머리 바이타디(BAITADI)에 주로 모여 사는 그들은 네팔 민주화 이후에도 움막과 동굴 등에서 겨울과 여름 우기를 나며 아이 낳고 살아온 극빈층. BPF는 현재까지 36채의 블록집을 짓고 냄비와 식기 등 생필품을 제공했다. 텃밭과 함께 키위 아보카도 같은 고급 과일 유기농 재배법을 전수해 자립 터전도 마련해줬다. 난생 처음 지붕 있는 집에서 자봤다는 53세 남자와 그의 가족 이야기, 유일한 생계원이던 아버지가 사고로 불구가 된 뒤 13살에 인도로 일하러 갔던 23세 청년이 BPF 덕에 귀국해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된 이야기 등 달리츠들의 사연이 BPF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다.

2011년‘spotlightnepal’인터뷰에서 애덤스는 “청년들이 나의 희망이자 네팔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왕실과 귀족이 있던 시절에도 그들은 마을과 평민들의 삶에 거의 관심이 거의 없었지만, 빈부격차는 그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커진 것 같다. 지금은 돈이 사람을 차별한다. 사람들도 달라져 탐욕과 부패가 우리(네팔)의 문화가 된 듯하다.(…) 내가 처음 왔을 때의 네팔은 지금 같지 않았다. 네팔은 서구의 가장 나쁜 것들만 받아들인 듯하다(…) 물론 판차야트의 시절과 달리 인권에 대해 각성한 점 등은 좋은 변화다.(…) 내게 지금보다 나은 네팔, 새로운 네팔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건 오직 청년뿐이다. 뭐가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들이 몰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병인 심장병으로 별세했다. 그의 시신은 네팔 국립대학인 카트만두 네팔아카데미에 안치돼 수많은 청년들과 작별한 뒤, 고인의 뜻에 따라 4월 24일 파슈파티나트 사원에서 화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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