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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쓰레기 쌓아놓고 뭘 계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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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쓰레기 쌓아놓고 뭘 계산하나

입력
2017.02.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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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니?”

마룻바닥에 어지러이 놓인 포장지며 비닐들을 가리키면서 초등학생 아이에게 툴툴거렸다. 쏜살같이 쓰레기통을 열었다 닫고 엄마 눈치를 보며 씩 웃는 아이에게 기어이 한 마디 보탰다. “자기가 만든 쓰레기는 스스로 치우기로 하자”고. 평소 뭐든 꼬치꼬치 따지고 보는 녀석도 이번엔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자기가 만든 쓰레기는 자기가 처리해야 한다는 건 초등학생도 안다. 하물며 그 쓰레기가 종이나 비닐이 아니라 인체와 환경을 해치는 위험물이면 만든 사람이 책임지고 처분하는 게 맞다. 우리 곁엔 1만4,000톤의 위험천만한 쓰레기가 쌓여 있다. 이를 담아놓은 임시 쓰레기통도 미어터질 지경이다. 그런데 답답하게도 이 쓰레기를 계속 보고만 있다.

위험천만한 이 쓰레기는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왔다. 전기를 만들고 남은 방사성 폐기물이다. 처분할 방법이 없어 원전 옆 대형 수조나 콘크리트 건물에 임시로 담긴 채 방치돼 있다. 남은 공간마저 점점 좁아지고 있어 2038년이면 더 이상 담을 틈이 없다. 말 많고 탈 많았던 논의 끝에 이 쓰레기를 땅 속에 영구히 파묻기로 했다. 결정했으니 서둘러 실행에 옮겨야 하는데, 일이 돌아가질 않는다. 나서서 실행해야 할 사람들이 계산기부터 두드리고 있으니 일이 될 리가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국회에서 첫발부터 묶였다. 원전 쓰레기를 어디에 묻을지 정하기 위한 절차를 정한 법이 논의석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있다. 늘 원전의 위험성을 강조해온 야당까지 소극적인 건 난센스다. 원전을 더 짓겠다는 정부 정책을 반대할 논리가 사라질 걸 우려해 법 논의를 미룬다는 후문이다. 쓰레기 치울 방안도 없는데 원전을 더 짓겠다는 게 말이 되냐는 논리를 펴온 야당으로선 쓰레기 처분 정책이 실행되기 전에 원전을 반대할 다른 명분이 필요할 것이다.

민감해진 정부와 국회는 법 공청회를 놓고도 엇박자를 냈다. 지난 2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에너지정책 정례브리핑에서 국회와 상의해 28일경 공청회를 열어 원전 쓰레기 법을 본격 논의하겠다고 밝힌 사실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자 국회는 공청회 개최에 여야가 합의한 바 없고, 이번 임시국회에선 법 심의와 공청회 모두 진행하지 않을 거라며 발끈했다. 이후엔 우린 할 만큼 했는데 국회 때문에 더 못 나간다며 정부가 여의도만 쳐다보는 상황이 이어질 게 뻔해 보인다.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는 학계에서도 들린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원전 쓰레기를 묻는다 하면 환영할 사람은 없다.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확실한 안전책과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 그렇게 제시된 안전책과 보상 정도면 쓰레기 처분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는 지역이 어디어디인지를 우선 살펴봐야 한다는 게 원자력학계의 생각이다. 하지만 지질학계는 펄쩍 뛴다. 원전 쓰레기는 적어도 500m 깊이의 지하에 묻어야 한다. 그러니 지반 구조와 암석 구성 등을 조사하는 게 먼저라는 입장이다.

둘 다 일리가 있다. 최선의 방안을 찾기 위해 열린 토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 9, 10일 진행된 관련 심포지엄에선 두 학계의 팽팽한 신경전만 감지됐다. 결국은 주도권 다툼이다. 원전 쓰레기를 묻을 시설을 완공하기까지 적어도 40년 가까이 걸릴 전망이다. 처음인 만큼 어마어마한 연구비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부에 따르면 원전 쓰레기 처분에 들어갈 돈이 해마다 약 8,000억원씩 누적돼 현재 5조원에 이른다. 실제 건설비를 제외하면 상당 부분이 연구비로 쓰이게 된다. 초반에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연구비 향방이 갈릴 테니 학계로선 물러서기 어려울 것이다.

원전 정책은 정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원전 쓰레기는 다른 문제다. 원전 정책이 어떻게 가든, 원자력이 싫든 좋든, 정권이 교체되든 안 되든 쓰레기는 상존한다. 안전하게 처분해야 할 대상일 뿐이지 학계의 헤게모니 싸움의 대상도 아니다. 스스로 만든 쓰레기를 아이들에게 치우라 떠넘기는 어른이 되진 말아야 한다.

임소형 산업부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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