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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한 동짜리 설움

입력
2015.08.2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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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만 있는 아파트에 살 때였다. 어쩌다 짜장면 한 그릇을 주문해도 “한 동만 있는 아파트 말이지요? 몇 호라구요?” 이렇게 되묻는 말 속의 ‘한 동’이라는 말이 무척 거슬리고 듣기 싫었다. 그 동네는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재개발된 오래된 곳이라 큰 단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건설회사가 지은 고만고만한 단지가 6개였고 다른 건설회사가 지은 단지가 2개 있었는데 8개 아파트 단지를 모두 돌아다녀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동네였다. 6개의 동이 있는 단지가 제일 컸고 2개의 동이 있거나 3, 4개 동이 있는 단지가 대부분이었으니 다른 곳의 큰 아파트 단지 1개 정도였다고 보면 될 듯하다.

그래도 어린이 놀이터, 경로당 등은 단지마다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우리 아파트는 조용하고 햇볕이 잘 드는데다 주차장은 널찍했고 지하철역과도 가까워 불만 없이 살았는데 그 놈의(?) ‘한 동’이라는 말만 들으면 부아가 치밀었다. 한 번은 주문한 음식점에서 예의 “한 동짜리 맞죠?”하는 말에 화가 치밀어 주문 취소하겠다고 큰소리로 외친 후 끊어 버린 적도 있다. 그땐 그 말이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이사 가기 위해 부동산사무소에 집을 내놓을 때도 그랬고 집 보러 오는 사람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한 동’짜리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살았지만 직장을 옮기게 되어 본의 아니게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쩌다 교육열이 높고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이 산다는 대단지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한 것인데, 그랬더니 사방에서 학원과 주식 투자, 해외여행 얘기가 들려왔다. 그렇잖아도 예전 동네보다 훨씬 비싼 물가와 비교조차 어려운 학원비 등에 신경이 곤두서던 차였다. 생활비야 절약하면 되겠지만 이런 상황에 아이가 적응하기 힘들어 하거나 기라도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어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렇고 벤치에서 얘기하는 아주머니들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이 동네는 학원과 주식투자, 해외여행 등 돈 들어가는 얘기로만 시종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다들 왜 그리 도도해 뵈는지 영 정나미가 없었다. 이웃은커녕 방향 감각도 생기지 않아 동서남북조차 모르니 이래저래 주눅이 들었나 보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그런 저런 말들이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긴장이란 오래가지 않는 것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계속 듣다 보니 익숙해서였는지 어쨌든 학원, 주식, 해외여행 등의 단어가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결정적 계기는 쓰레기 분리수거일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경비실 옆 자전거 두는 곳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곤 했는데, 경비원 아저씨가 휴가여서인지 그 날은 관리할 사람이 없었다. 그랬더니 주민들의 얍삽한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감시하는 눈이 없자 분리수거는커녕 온갖 쓰레기를 되는대로 던져 놓아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밤늦게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니 이건 문자 그대로 쓰레기장이지 분리수거 장소가 아니었다. 이 ‘사건’은 내가 사는 아파트 사람들의 내밀한 뒷모습을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아무리 겉이 멀쩡하고 돈이 많아 보여도 인간이란 본래 너절하고 비열한 구석을 온갖 위장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이 일과 예전 동네의 기억이 겹쳐진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들 한 동만 있는 아파트라고 하지 않았고 그 말이 결코 비꼬려는 말이 아니었음은 물론 틀린 말도 아니었다. 괜한 자격지심에 거슬리게만 들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대개의 사람은 자존감이 낮을 때면 끊임없이 주변과 비교하고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회피하려고 드는데 그때 내 경우도 그랬나 보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꾀죄죄한 현실은 여전하고 생각도 달라진 게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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