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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금융실명제…그리고 IMF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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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금융실명제…그리고 IMF 위기

입력
2015.11.22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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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 공과

박근혜 18대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박근혜 18대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에서 공과(功過)는 어떤 역대 대통령보다 뚜렷하다. 젊은 나이에 정치에 뛰어든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폭압에 맞서며 1980년대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3당 합당이라는 파격적 도전을 통해 대권을 잡은 그는 집권 초 금융실명제와 군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국민적 기대감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 후반기 경제 정책의 실패로 IMF 구제금융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평가와 함께 차남인 김현철씨의 권력 사유화 논란으로 정치 역정에 상당한 오점도 남겼다.

금융실명제와 독재잔재 청산의 공로

김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중 업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금융실명제다. 가명 및 차명 거래가 각종 금융 비리 사건과 부패 사건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꾸준하던 차에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93년 8월 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을 통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전격 실시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다. 공직자들의 비리를 차단하고자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 도입을 위해 솔선수범한 것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종용했고 이에 고위공직자들의 재산 공개가 자리 잡는 기틀이 마련됐다. 김 전 대통령은 또 91년 이후 실시되던 지방자체제도를 확대해 95년 7월부터 특별시와 광역시직할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까지 주민들이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군사독재 정권 청산에도 역점을 뒀다.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12ㆍ12쿠데타로 집권했던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고소ㆍ고발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군부의 반란죄와 내란죄 등을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뒤이어 전ㆍ노 두 전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폭로가 터져 나왔고 이후 사회적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김 전 대통령은 5ㆍ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결국 검찰은 1996년 1월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기소했다.

군정종식을 내걸었던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도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는 전격적으로 하나회를 숙청한 뒤 주변에 “깜짝 놀랐제”라며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남북관계 요동과 정권 말기의 혼란

김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남북관계도 상당히 요동치는 시기였다. 북한이 본격적인 핵개발에 나서면서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했고 한반도의 긴장분위기는 고조됐다. 미국은 영변 핵시설 폭격 고려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전쟁을 중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국군을 한 명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다”고 위기상황을 저지한 상황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백악관은 “김 전 대통령에게 그런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며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통화 기록까지 제시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당시 대북 특사였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 김일성 주석과의 대화를 통해 핵동결에 합의함으로써 위기는 봉합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 주석은 나아가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김 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 의지를 제안했고 실무협의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김 주석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무산됐고 이후 남북관계도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대외관계에서는 특히 일본에 강경노선을 유지한 점이 특이하다. 일본 정부 당국자들이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이어가자 김 전 대통령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한 발언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임기 중후반기부터 조짐을 보여 왔던 경제 위기에 대한 실책이다. 96년 선진국 진입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계기로 경제 정책에 피치를 올리는 듯 했지만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의 연이은 도산 등 곳곳에서 켜진 적신호에 대해 안일하게 대처 결국 외환관리 및 금융감독 실패로 IMF 구제금융을 초래했다.

비슷한 시기 차남 김현철씨가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돼 옥살이를 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치명타를 맞게 된다. 김현철씨 비리 사건과 관련 김 전 대통령은“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집권 후반기에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구포역 열차전복 사고,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 등 유독 대형 인명 피해를 낸 인재들도 줄을 이었다.

이동현기자 nani@ha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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