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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깨뜨리고 여성참정권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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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깨뜨리고 여성참정권 얻다

입력
2016.03.1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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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 지음ㆍ김진아 권승혁 옮김

현실문화 발행ㆍ480쪽ㆍ1만8,000원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연설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 거리로 나선 여자가 있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진정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에 정갈하게 모자까지, 격식 갖춘 복장을 입은 이 여성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여성의 참정권 획득.

20세기 초 영국에서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 불렸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가 출간됐다. 책은 1913년 팽크허스트가 미국인 저널리스트 레타 차일드 도어에게 ‘여성사회정치연합’을 만들게 된 배경과 운동이 점점 더 전투적인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에 대해 구술한 것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한 명의 투쟁가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화처럼 생생하게 그려 낸 이 책 덕에 오늘날 독자들은 1900년대 초 트래펄가 광장, 투쟁의 거리 한 가운데로 소환된다.

팽크허스트가 진두지휘한 참정권 운동은 가두시위, 날 선 연설, 유리창 깨기, 방화, 단식 투쟁을 서슴지 않았다. 구타, 체포, 투옥,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팽크허스트가 처음부터 강경했던 건 아니다. 그녀는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합을 설립한 뒤 4년간의 비폭력 투쟁을 진행했다. 남성 의원들을 설득하고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정치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참정권 운동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팽크허스트를 비롯한 지지자들의 대중 연설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의회에서도 여성 참정권과 관련된 일들은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 팽크허스트의 말처럼 “이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이런 상황에까지 몰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지난한 투쟁 끝에 1918년 30세 이상의 영국 여성이 투표할 수 있게 됐고, 이후 영국 정부는 투표권을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에게 확대했다. 1928년, 팽크허스트 사망 직후였다.

유리창을 깨는 전투적 방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방점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닌 유리창을 깨뜨리는 순간 발생하는 파장에 찍혀야 한다. 연설대와 재판장 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팽크허스트의 명료한 언어와 여성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 참정권 운동은 성공한 역사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삶이 유리창보다 더 귀중하지 않나요? 우리는 법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만드는 사람입니다”라고 팽크허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팽크허스트가 남긴 발자취는 오늘날의 사회운동에도 시사점을 남긴다. 특히 지난해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커다란 분기점을 지나왔다. SNS에서 시작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공허한 외침으로만 끝나지 않고 실제적인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면서,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한층 격앙된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다만 팽크허스트가 거리로 나서야만 했던 때와는 달리, 이제 길은 거리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SNS들이 거리를 대신하는 등 길은 다양해졌다. 공론장으로 나아가려 끊임없이 시도하는, 돌을 집어 들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여성들은 오늘날에도 팽크허스트를 이어가고 있다.

한소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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