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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판 떠난 뒤에도…나는 영원한 빙상인”

입력
2018.01.01 04:40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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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서 연습하던 한국 빙상

中2때 경기복 없어 교복 입고

전국대회 500m 출전해 1등

당당히 이화여중 빙상부 들어가

*1960년 스쿼밸리올림픽 출전

빙질 좋아 연습 때 계속 ‘꽈당’

美 선수들이 스케이팅 도움 줘

23명 출전한 500m서 21위 기록

*동계올림픽 개최국 되다니…

“신체조건ㆍ불리한 경기장 때문에

한국 빙상 일류 될 수 없다 생각

평창 출전 후배들과 함께 할 것”

1960년 미국 스쿼벨리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해 우리나라에서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첫 번째 여성 국가대표 선수로 기록된 김경회 여사가 1960년 출전 당시 사진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류효진기자
1960년 미국 스쿼벨리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해 우리나라에서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첫 번째 여성 국가대표 선수로 기록된 김경회 여사가 1960년 출전 당시 사진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류효진기자

196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쿼밸리 리조트에서 열린 제8회 동계올림픽. 당시 이화여대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경회(77)가 가슴팍에 태극마크를 달고 500m 출발선에 섰다.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이 처음으로 올림픽 종목에 채택된 대회였다. 힘찬 총성이 울리자 눈을 질끈 감고 달렸다. 때론 비틀거리기도, 때론 휘청거리기도 하다 53초2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출전 선수 23명 중 21등, 함께 출전한 한혜자(76)는 이보다 0.6초 뒤진 22등이었다. 금메달리스트인 헬가 하세(독일단일팀)의 45초9보다 약 8초 늦었다. 스웨덴의 엘사 아인나르손이 경기를 포기했으니 사실상 한국 선수들이 꼴찌와 꼴찌에서 두 번째였던 셈이다.

그렇게 첫 씨앗을 뿌린 지 34년 만인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에서 드디어 한국의 첫 여성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쇼트트랙 전이경 금2)가 나왔다. 그리고 한국 빙속 간판 이상화(29)는 2010년 밴쿠버, 2014년 소치 대회에서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3연패에 도전한다.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된 김씨는 이런 후배들의 활약상을 볼 때마다 차오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그는 40여 일 앞으로 다가온 평창올림픽을 누구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평창올림픽의 해 2018년을 맞아 국내 여성 1호 동계 올림피언 김경회 씨를 한국일보가 만났다. 인터뷰는 지난 달 27일 서울 강동구 그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1960년 미국 스쿼벨리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해 우리나라에서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첫 번째 여성 국가대표 선수로 기록된 김경회씨가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1960년 미국 스쿼벨리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해 우리나라에서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첫 번째 여성 국가대표 선수로 기록된 김경회씨가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김경회 씨는 정구, 수구, 아이스하키 등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선친의 영향으로 남들보다 일찍 스케이트를 접했다. 본격적으로 스케이트 선수의 꿈을 꾸게 만든 건 우연히 펼쳐 든 한 장의 신문광고였다. “이화여중 2학년 때였는데 ‘전국 중ㆍ고등학교 빙상대회’ 출전 신청을 받는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광고지를 들고 무작정 빙상연맹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학교 빙상팀에 소속된 학생만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학교로 달려가 이화여중 빙상팀 선생님께 말씀 드렸더니 대회 날 일단 나와보라고 하셨어요.”

대회장인 한강에 나간 김경회씨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상상초월’이었다. 평소 창경궁, 청량리 등지에서만 스케이트를 타던 그에게 400m짜리 링크는 너무 커 보였고, 선수들은 모두 안정적인 자세로 뒷짐을 지고 얼음판을 가르고 있었다. “저는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어서 팔을 막 휘저으면서 탔는데 다른 사람처럼 뒷짐을 지고 균형을 잡아보려고 하니까 자꾸 넘어지는 거예요.” 경기복도 없이 교복을 입고 500m 시합에 출전했다.

“빵!하는 총소리가 울리고 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렸는데 제 폼이 웃기니까 사람들이 다들 웃는 거예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들 제 뒤에 있었어요. 1등이었죠. 정말 짜릿했어요.”

모두의 예상을 깬 그는 이화여중 빙상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케이터 김경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정식으로 스케이트를 시작하면서 실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입상을 놓치지 않았다. 국내 무대를 제패한 그는 자연스럽게 올림픽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올림픽 출전을 꿈꾸며 열심히 훈련했어요. 한강 얼음이 녹는 2월 중순이 되면 매일 새벽 5시에 남산 계단 375개를 스케이팅 자세로 올랐어요. 학교 수업을 마친 뒤에는 장충동으로 가서 지상운동을 이어갔죠.”

때마침 1960년 동계올림픽 때 처음으로 여자 스케이트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59년 전국 선수권대회 1위를 차지한 그는 라이벌 한혜자와 함께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1960년 스쿼밸리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신업재(왼쪽부터) 스키연맹 회장, 최영배ㆍ장인원ㆍ장영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김하윤 노르딕 복합 선수, 임경순 알파인 스키 선수, 김용구 스케이트 코치, 한혜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아래 왼쪽), 김경회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김경회씨 제공.
1960년 스쿼밸리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신업재(왼쪽부터) 스키연맹 회장, 최영배ㆍ장인원ㆍ장영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김하윤 노르딕 복합 선수, 임경순 알파인 스키 선수, 김용구 스케이트 코치, 한혜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아래 왼쪽), 김경회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김경회씨 제공.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3명, 남자 스키 2명,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2명 총 7명으로 구성된 선수단이 꾸려졌고, 현지 적응을 위해 대회 개막 한 달여 전 올림픽 선수촌에 입성하기로 했다. 출전 자금도 선수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탰다.

“미국 선수들이 가장 먼저 선수촌에 들어갔고 한국이 두 번째였어요. 일찍 가서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1960 스쿼밸리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국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김경회씨 제공
1960 스쿼밸리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국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김경회씨 제공

첫 출전하는 올림픽을 앞두고 제대로 준비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선수단 단복조차 현지에서 조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선수단은 가장 먼저 대형 마트에 들러 철 지난 값싼 스웨터를 단복으로 골랐다. 그렇지 않아도 초라한 선수단 규모였는데 찬 바람 막아 줄 수 없는 얇은 스웨터 한 장 걸치니 추위가 더욱 혹독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미리 준비해 간 ‘KOREA’ 글씨가 그나마 시린 가슴을 가려주는 한 줌 위안이었다.

김경회씨가 1960년 올림픽 참가 확인증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류효진기자
김경회씨가 1960년 올림픽 참가 확인증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류효진기자

처음 겪어본 국제무대는 차원이 달랐다. 한국 선수들이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좋은 얼음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한강얼음이 유일한 빙상장 이었는데, 표면이 울퉁불퉁한 건 물론이고 모래나 흙, 나뭇잎, 눈덩이 등 각종 이물질로 뒤덮여 있었어요. 때문에 얼음바닥을 발로 깨면서 앞으로 밀고 나가는 주법으로 탔었죠. 날을 가는 방식도 그에 맞춰져 있었고요. 그런데 올림픽 경기장을 가니 너무 미끄러워서 서 있을 수 조차 없었어요.”

일찍 선수촌에 들어와서 연습장에서 자꾸 넘어지기만 하는 한국 선수들이 안쓰러웠던 지 미국 선수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미국 친구들이 저희를 하나씩 붙잡고 스케이팅을 가르쳐줬어요. 덕분에 조금 덜 넘어질 수 있었죠. 바바라, 베버리…지금도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없네요.”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김경회(오른쪽)가 미국 선수와 대회하고 있다. 김경회씨 제공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김경회(오른쪽)가 미국 선수와 대회하고 있다. 김경회씨 제공

예상대로 올림픽의 벽은 높았다. 김경회는 여자 500m와 여자 1,500m에서는 21위를 하고 여자 3,000m에서는 20위에 올랐다. 미국 선수들의 친절한 레슨에도 불구하고 여자 1,000m는 경기 도중 넘어져 완주하지 못 했다. 그렇게 김경회씨의 첫 도전은 끝났다.

한국 동계 스포츠는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1925년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가 한강에서 개최한 제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는 날씨가 생각보다 따뜻해 한강 얼음이 깨질 것을 염려한 경찰이 경기를 제지하기도 했다. 전국동계체육대회 스케이팅 경기가 건국대학교 안에 있는 호수에서 벌어진 적도 있다.

김경회씨가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 출전 당시 사진을 보고 미소짓고 있다. 류효진기자
김경회씨가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 출전 당시 사진을 보고 미소짓고 있다. 류효진기자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김경회가 뿌린 씨앗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1964년 인스부르크부터 1984년 사라예보 대회까지 한국은 3명 안팎의 여자 선수를 꾸준히 내보냈지만 20위권 밖에 머물렀다. 1971년 태릉선수촌 안에 국제 규격의 아이스링크를 만들면서 한국 빙상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암모니아 가스를 이용해 인공으로 얼음을 얼릴 수 있어서 선수들의 훈련시간도 크게 늘었다. 이윽고 한국은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이상화가 500m 금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맛봤고 이제는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만큼 강국 반열에 올랐다.

“저는 한국이 절대로 스케이트 일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타고난 신체조건이 서양선수들에 비해 불리하고 경기장 여건도 좋지 않아서 한국 선수가 시상대에 올라가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죠. 그런데 지난 20여 년간 집중적인 투자와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젠 동계스포츠 불모지에서 동계올림픽 개최국이 됐잖아요. 최근 동계올림픽 때마다 200명이 넘는 한국 선수단이 개회식에서 입장하는 장면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김경회씨는 스쿼밸리 올림픽 이후에는 더 이상 스케이트화를 신지 않았다. 유학을 목표로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렸고,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25년 동안 일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IMF의 문을 두드리는 것부터 그 안에서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는 스케이트 타면서 익힌 ‘깡’을 발휘했다.

나이 여든을 바라보는 김경회씨는 지금도 자신을 빙상인이라고 여긴다. 지난 해에는 고생하는 후배들이 안쓰러워 밥 한끼 대접하려고 태릉선수촌에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저는 영원한 빙상인입니다. 올림픽 출전 이후 다른 길을 걷느라 스케이트를 다시 못 신었지만, 올림픽에 나간 그 정신은 영원히 저와 함께 할 겁니다.”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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