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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프레임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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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프레임의 정치학

입력
2016.01.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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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정부간 합의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 등이 이달 6일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 소재 외무성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위안부 소녀상 분장을 한 여성이나 소녀상 가면을 쓴 참가자들이 현장에 모여 있다. 도쿄=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정부간 합의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 등이 이달 6일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 소재 외무성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위안부 소녀상 분장을 한 여성이나 소녀상 가면을 쓴 참가자들이 현장에 모여 있다. 도쿄=연합뉴스

정치에선 언어선택이나 상징을 통한 프레임전략으로 승패가 갈릴 수 있다. 올 여름 참의원선거에 사활이 걸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연초부터 “개헌세력 3분의2 의석 획득”이란 구호를 들고나왔다. 일본 보수진영의 총궐기를 시도한 것이다. 현재의 연립여당만으론 평화헌법을 개정할 국회정족수를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는 일본 민주당의 행태가 참으로 답답해 보인다. 지지율이 한 자리수인 처지를 반영한 듯 참의원선거용으로 내놓은 포스터엔 “민주당은 싫지만, 민주주의는 지키고 싶다”고 노골적인 자학전략을 담았다. 무엇보다 유신당, 공산당 등을 공동투쟁의 대열에 묶을 수 있다며, 아베 총리가 던진 화두에 운을 맞춰 “개헌세력 3분의2 저지”란 수동적 캐치프레이즈를 띄우고 있다.

과연 의도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 10년 전 한국정치 현장을 떠올리면 결과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초강세로 맥을 못추고 있었다. 이때 열린우리당 정동영 당의장은 전국을 돌며 “한나라당의 싹쓸이만은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당 대변인은 야당이 기초단체장 197곳을 공천했는데 이 중 160곳이 당선될 판이라며 “이대로가면 어마어마한 결과가 예상된다”고 읍소전략을 폈다. 이를 두고 당시 열린우리당 모 의원은 기자에게 “세상에 이런 선거구호가 어디 있나, 상대가 싹쓸이한다고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전략을 짜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물론 그도 대안을 제시하진 못한채 발만 동동 굴렀다.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대참패였다. 16개 시장ㆍ도지사 중 12석을 한나라당에 빼앗기고 호남에선 민주당에 밀렸다. 이후 386의원들 사이에선 조지 레이코프 교수가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란 책이 유행했다. 상대가 설정한 개념이나 구호를 논쟁도구로 쓰지 말라는 ‘프레임이론’이었다. 레이코프 교수는 미국 민주당의 대선패배 원인을 공화당이 제시한 ‘세금구제(tax relief)’란 용어를 썼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레이코프 교수의 분석은 참여정부 김병준 청와대정책실장의 사례에도 부합한다. 김 실장은 2006년 5월 강연에서 종부세를 늘리는 게 선진국에 비해 멀었다며, 야당이 ‘세금폭탄’이 아닌 것을 폭탄으로 부른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이때부터 대중은 폭탄, 폭탄하며 세금폭탄이란 말에 빨려 들어갔다. 적극 해명한다는 게 반대측의 이슈파이팅을 도와준 꼴이 됐다. 그보다 시원하게 정권을 욕할 문구를 찾기 힘들었다. “싹쓸이를 막아달라”는 외침 역시 싹쓸이 충동을 자극했다.

아베 총리도 프레임전쟁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 안보법 국면에서 ‘전쟁법안’이라 공격받자 ‘평화안전법제정비법안’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자 보수언론이 “일본의 평화를 위해 오랜 과제인 집단자위권 행사 의미가 크다”고 몰아붙였다. 아베 총리는 최근 개헌항목으로 제시한 긴급사태조항을 야당이 나치정권의 전권위임법에 빗대자 국회 분위기가 험악해질 정도로 발끈했다. 나치 딱지붙이기의 파괴력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 과거사 관련 요구조건을 계속 바꾼다는 ‘골대 이동론’을 비롯해 지루한 프레임싸움을 벌여왔다. 그런데 위안부협상이 끝나자 우익 일각에선 ‘최종적 합의’가 일본 스스로 왜곡된 위안부 실상을 바로잡을 기회마저 차단한 것 아니냐는 반발이 나왔다. 위안부소녀상이 얼마나 위력적인 상징수단이었는지 다시 실감하게 된다. 소녀상이 각지에 있는 한 일본의 과거 만행은 세계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소녀상은 식민지 한반도의 어린 소녀가 총칼에 무참히 끌려가는 형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상시킨다. 약자의 대항수단으로서 이보다 치명적인 프레임전략은 없을 것이다. 그런 소녀상이 지금 자국정부에 의해 위기에 몰려 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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