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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저항 ‘단식’ 누가 웃음거리 만드나

입력
2016.10.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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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관계자들이 지난 2일 단식투쟁 중인 이정현 당 대표를 찾아 위로하고 있다. 전형적인 종교화의 구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새누리당 관계자들이 지난 2일 단식투쟁 중인 이정현 당 대표를 찾아 위로하고 있다. 전형적인 종교화의 구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것은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단식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덥수룩한 수염을 한 채 눈을 감고 누워 주변의 근심 어린 시선을 받는 그의 모습은 낡고 오래된 종교화를 연상시킨다. 강력한 발언력을 지닌 집권여당 대표는 약자들의 무기인 단식을 빼앗아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그들을 닮은 비장한 사진 이미지마저 가지고 싶어하는 듯하다.

이정현 대표의 단식이 나쁜 것은 단지 탐욕스럽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희화화됨으로써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단식이라는 투쟁의 의미를 더 약화시키는 결과까지 가져왔다. 그렇지 않아도 단식투쟁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는 갈수록 가혹해지고 있는데 말이다.

1931년 평양 평원 고무공장의 여성노동자 강주룡이 올랐던 을밀대의 높이는 고작 12m에 불과했다. 강주룡이 그곳에 있었던 것은 8시간, 강제로 끌어내려진 그녀는 경찰서에서 76시간 단식을 했다. 아마 요즈음이라면 신문 단신으로도 보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체공녀’ 강주룡의 이야기는 신문과 잡지에 실려 널리 보도되어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이끌어냈다. 평원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을 막아냈다.

최초의 여성노동운동가라 불리는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농성 중이다.
최초의 여성노동운동가라 불리는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농성 중이다.

하프톤 인쇄술 보급 뒤 큰 파장

지금 우리 사회의 노동자와 약자들이 올라가는 철탑과 굴뚝은 을밀대와 비교할 수 없이 까마득하다. 그들은 아찔한 철탑 위에서 수백 일을 버티고, 광장에 앉아 수십 일 동안 곡기를 끊고 견딘다. 그러나 세상의 눈과 귀는 예전보다 더 어둡고 무심하다. 이제는 단식과 고공농성으로 이목을 끌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목숨을 건 이들 옆에서 고기를 굽고 치킨을 먹으며 조롱한다. 낯설고 잔인한 풍경이다.

왜 철탑에 올라가고, 왜 단식을 하는가.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귀를 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이다. 단식은 자신의 말이 생명만큼 무겁고 중요하다는 약자들의 맹세다. 누군가 단식을 선언하는 순간 사회에는 어떤 거대한 모래시계가 세워진다. 떨어지는 모래알은 그의 생명력이다. 그것이 전부 바닥나기 전에 모래시계를 뒤집지 않으면, 우리는 참혹한 사회적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단식은 너무 늦기 전에 사건을 중재하기 위해 행동할 절박한 의무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약자들이 행하는 단식 투쟁의 역사는 기원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깊고 오래되었다. 하지만 단식이 강력한 사회적 위력을 지닌 저항의 방식이 된 것은 ‘하프톤 인쇄술’이 보급되어 신문에 사진이 실리게 된 19세기 후반 이후의 일이다. 사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곡기를 끊은 이들의 육체가 시시각각 말라비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고통과 배고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생명체로서 인간이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며, 그래서 단식 사진은 우리 사회의 구석에서 누군가 목숨을 걸고 고통스럽게 발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도록 한다. 단식하는 이들 역시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말라가는 몸 사진 이미지를 제공한다. 이런 호기심과 공감, 분노와 두려움을 연료로 단식 투쟁은 강력한 힘을 얻는다.

둔감과 조롱의 벽에 부닥치다

그 힘은 권력을 두렵게 한다. 20세기 초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운동가들이 택한 방식 중 하나도 옥중 단식투쟁이었다. 처음에는 교도소 당국에 의해 풀려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강제급식을 당했다. 철제 침대나 의자에 묶여서 억지로 코나 입에 고무관을 넣어 음식물을 주입하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강제 급식 대신 몇 사람이 단식을 하다 죽게 두면 나머지는 위축되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온다. 이에 대해 한 상원의원은 이렇게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건 과격 행위를 없애기는커녕 세상에 다시 없을 과격 행위를 부추기는 최고의 장려책이 될 것이오.” 단식이 죽음으로 이어졌을 때의 사회적 충격과 공감이 권력도 두려워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마하트마 간디는 목숨을 건 열일곱 번의 단식을 통해 국가와 정치의 지형까지 변화시켰다. 대영제국의 압제와 힌두교—이슬람교의 대립, 불가촉 천민에 대한 차별 등에 맞서 그는 단식했고, 간디를 죽게 하지 않기 위해 세상은 매번 양보했다. 심지어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식투쟁에 들어갔을 때는 서슬 푸른 군사정권마저도 한발 물러나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했던 단식이 이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단식하는 이들이 견뎌야 하는 고통이 예전보다 줄어들어서는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단식은 강주룡이나 간디의 시대에 있었던 그것보다 훨씬 길고 처절하다. 작년 말 총장과 이사장 사퇴를 요구하며 50일간 단식한 동국대 총학생회 김건중 부회장은 소금마저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동공이 풀린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반향은 놀랍도록 작았고, 대학은 태연히 그에게 무기정학 징계를 내렸다.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은 광장에서 2년째 단식을 이어나갔지만, 쏟아진 것은 조롱에 가까운 놀림과 의혹 제기였다.

세월호 유족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2014년 8월 단식농성 중 병원으로 이송 중이다. 김씨는 자신의 단식을 증거하기 위해 취재진 앞에서 옷을 걷어 올려 앙상한 몸을 보여줘야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세월호 유족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2014년 8월 단식농성 중 병원으로 이송 중이다. 김씨는 자신의 단식을 증거하기 위해 취재진 앞에서 옷을 걷어 올려 앙상한 몸을 보여줘야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단식의 고통을 전달하고 공감하게 하는 사회적 수단이었던 사진은 비웃음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유족들의 농성장에서 초코바 박스를 발견했다는 주장과 함께 일베 사이트에 사진이 올라왔다. 그 사진 속의 장소가 진짜 유족들의 농성장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 사진이 합성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단식을 하는 유가족들이 그것을 먹었다고 추정할 이유도 없다. 유가족의 주치의는 그들이 급격히 체중을 잃고 있다는 것을 증언했고, 유족 중 한 명인 김영오씨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마른 몸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46일을 버티다 병원에 실려갔지만, 집요한 사생활 의혹 제기 때문에 딸과 함께 병상에 다정히 누운 사진을 ‘인증’해야만 했다.

단식 메시지에 무감각해져선 안 돼

속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때문일까. 단식 투쟁을 하는 이들과 단식 세계기록에 도전하는 이들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하게도 문제의 핵심은 며칠 동안 단식하면 사람이 죽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식하는 이들이 내세운 말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조롱과 냉소주의에 부딪친 단식은 갈수록 그 힘을 잃고 약해지기만 한다.

그와 함께 우리 사회는 점점 타인의 굶주림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있는 듯하다. 최소한 몇 년 전만 해도 단식 하는 이들의 옆에서 고기를 굽고 치킨을 먹는 이들은 없었다. ‘단식을 제대로 하면 이미 쓰러져야 하지 않냐’는 식으로 묻는 여당 국회의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식이라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의심 받고 놀림 받는 일이 될 때, 사회적 약자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절박함을 표시할 수 있을까. 목숨 말고 또 무엇을 걸라는 말인가.

이정현을 충분히 조롱하였으므로, 약자들은 승리하였는가? 어쩌면 그는 약해지는 단식 투쟁에 의도치 않은 치명타를 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역대 최단 단식’이라는 말은 가혹하다. 앞으로 사회적 약자들은 최소한 8일 이상을 견뎌야 할 것이다. 사실 고작 2, 3일을 굶는 것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충분한 건강과 돈을 지니지 못한 약자들에게는 그것조차도 치명적일 수 있다. 가뜩이나 단식 투쟁 하는 이들이 견뎌야 하는 시간은 갈수록 길어지고, 기어올라가야 하는 철탑은 높아지는데 말이다.

정치인의 뻔뻔스러운 행위에 대한 비판과 조롱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타인의 굶주림에 대한 공감과 분노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자주 접한다면 그것을 다루는 감각은 근육처럼 단련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피부처럼 두꺼워지고 거칠어지는가. 사진을 공부하는 이들은 주로 후자에 거는 편이다. 비판을 할 때는 날카롭지만, 사진 속에서 고통을 견디며 굶고 있는 몸을 만났을 때는 분노하며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가 자신의 근육을 분해해 연명하면서 필사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좋겠다. 밥을 굶고 철탑에 오르지 않더라도, 약자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김현호 사진비평가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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