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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출산, 여성은 분만의 주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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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출산, 여성은 분만의 주체인가

입력
2015.10.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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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그 놀라운 역사

티나 캐시디 지음ㆍ최세문 등 옮김

후마니타스 발행ㆍ512쪽ㆍ2만원

로마의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가 쓴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에 묘사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탄생 모습. 제왕절개의 시초로 알려졌으나, 카이사르의 모친이 장수한 것으로 미루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웰컴도서관 소장
로마의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가 쓴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에 묘사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탄생 모습. 제왕절개의 시초로 알려졌으나, 카이사르의 모친이 장수한 것으로 미루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웰컴도서관 소장

인간은 분만시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지구상 유일의 동물이다. 직립보행으로 인해 골반은 점점 작아진 데 반해 만물의 영장답게 머리는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원숭이나 북극곰 같은 네발동물은 넓은 산도 덕분에 2분이면 분만이 끝나는 반면 인간은 길면 며칠씩이나 산통을 겪는다. 그뿐인가. 산도에 갇힌 아기를 제때 꺼내는 데 실패하면 산모와 아기 모두 치명적 결과를 맞는다. 대부분의 동물이 새끼를 낳을 때면 한적한 곳을 찾아 이동하는 것과 달리 인간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조력을 요청하는 이유다.

진화가 여성에게 안겨준 커다란 고통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종종 잊고 있는 경이다. 보스턴글로브 기자로 20여년간 일해온 티나 캐시디는 자연분만 실패 후 긴급 제왕절개로 첫 아이를 낳은 후 이 경이적 모순을 강렬하게 느꼈다. 자연은 분명 임신과 출산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설계했을 텐데, 여성은 왜 사산과 자궁파열과 산욕열과 복막염 등 온갖 위험에 노출된 채 비참한 ‘환자’의 모습으로 병실에 누워있는 걸까. 어떤 과정을 거쳐 출산은 의학적 개입이 필요한 고통스런 질병이 돼버린 걸까.

‘출산, 그 놀라운 역사’는 저자의 이 궁금증에서 시작된 출산의 세계 문화사다. 직립보행의 위대한 유산이 초래한 부작용에 인류가 맞서온 기록이자 여성을 타자화ㆍ도구화한 무지와 야만의 역사이기도 하다. 할머니나 어머니였던 분만의 조력자가 여성 조산사에서 남성 의사로 바뀌는 과정, 아기 머리를 잡아 빼내는 집게인 겸자부터 마취, 초음파에 이르기까지 분만에 사용돼온 도구와 장비들의 변천사, 오두막 짚단에서부터 집, 병원, 출산센터로 분만의 장소가 변화한 이유 등을 두루 훑으며, 우리가 지극히 자연스럽거나 과학적 표준에 입각해 있다고 여기는 임신과 출산의 방법이 실은 시대와 장소의 반영일 뿐임을 책은 보여준다.

출산, 그 놀라운 역사
출산, 그 놀라운 역사

저자가 각별한 애정을 담아 복원한 것은 산파의 역사다. 능숙한 산파는 안구를 후벼 파지도, 목뼈가 부러지지도 않게 아기를 잘 받는 것뿐 아니라, 언제 어떤 자세로 아기가 산도를 돌기 편하도록 움직여야 하는지, 산모의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의 시대가 대두되며 남성 외과의들은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여성 산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일자리를 빠르게 잠식해갔다. 아기들을 안전하게 분만하기에는 산과학의 수준이 너무 형편없는 것이어서 영아사망률은 되레 치솟았고, 손을 씻지 않은 의사들이 옮기는 미생물로 인해 산욕패혈증에 걸린 산모가 한 분만병원의 50%를 점할 정도였지만, “가정출산은 가장 초기 형태의 영아 학대”라는 의사들의 주장은 대개 먹혀 들었다. 분만공장과도 같은 산과병원 대신 가정에서 조산사와 아기를 낳는 게 더 나은 출산 결과를 나타낸다는 것은 오늘날 고위험 산모군에서도 입증되는 바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병원분만율은 여전히 99%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여성은 출산의 주체였던 적이 거의 없다. 출산의 고통을 이브의 원죄에 따른 신의 징벌로 규정한 성경 때문에 여성들은 수백 년간 통증완화제를 쓰지 못했다. “분만 중 모든 극심한 통증과 고통은 엄마가 아기를 더 많이 사랑하도록 영감을 주는 과정”이라는 남성 외과의의 주장으로 마취제를 쓰지 못했던 것이 불과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산모들이 의사의 편의를 위해 분만에 도움이 되는 쪼그려 앉기 대신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세를 취하며 고통과 굴욕을 참는다. 출산의 주체가 산모와 아기, 가족이 아니라 병원의 의료진인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여성 주체의 주체적인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보다 다양하고 자연친화적인 방식의 출산이 각광을 받고 있다. 고위험 산모도 가정분만이나 수중분만을 고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출산에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고, 그것은 당대 사회와 문화의 산물이다. 적어도 산모가 그 중 하나를 선택할 권한은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 사라진 ‘관장, 제모, 회음부 절개’의 분만 굴욕 3종 세트부터 몰아내보면 어떨까.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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