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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배할 힘 남에게 넘겨주는 건 사악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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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배할 힘 남에게 넘겨주는 건 사악한 일

입력
2014.07.25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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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 지음ㆍ송은주 옮김

문학동네ㆍ244쪽ㆍ1만3,000원

토니 모리슨의 ‘자비’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이 엇갈린 메아리처럼 애처롭게 울리는 소설이다. 2008년 미국에서 발간된 이 소설은 “토니 모리슨이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원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동네 제공
토니 모리슨의 ‘자비’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이 엇갈린 메아리처럼 애처롭게 울리는 소설이다. 2008년 미국에서 발간된 이 소설은 “토니 모리슨이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원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동네 제공

노예제도 탄생 前 17세기 미국 16세 흑인 여성 노예의 삶 그려

노벨상 작가 모리슨의 2008년 작… 그녀 소설의 원전으로 평가받아

끊임없이 문학의 호출을 받는 역사의 특정 시기 혹은 사건이 있다. 유럽의 아우슈비츠, 한국의 ‘5월 광주’가 그렇다. 식민지 침략과 독립전쟁의 피범벅 속에 출범한 신대륙 국가 미국에서는 노예제가 이에 해당한다. 인류 역사의 이런 치명적 사건들은 소재의 익숙함으로 인해 윤리적 사명의 진부한 반복에 그치기 쉽지만, 일급작가들은 그들의 역작을 통해 독자의 내면을 강타하는 깊고 묵직한 감동을 ‘바로 이곳’에서 길어 올린다.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83)의 2008년도 장편소설 ‘자비’는 노예제가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전인 17세기 말의 미국 식민지 시대를 다룬다. 건국 이전인 이 시기의 미국은 흑인이든 원주민이든 백인이든 누구나 노예가 될 수 있는 평등한 고통의 공간이었다. 주인과 노예를 결정짓는 것은 힘이었고, 신분과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벌어지는 폭력과 약탈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적나라했다. 흑인 여성 작가로서 인종과 성의 문제에 문학의 이력을 헌납해온 모리슨은 억압과 핍박의 기원을 찾아 건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패자로 사라져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해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16세의 흑인 여성 노예 플로렌스. 역시 노예였던 엄마는 주인이 빚 대신 노예 중 하나를 팔아 넘기려 하자, 품에 안고 있는 어린 아들 대신 딸 플로렌스를 데려가 달라고 울며 애원한다. 공포 속에서 새 주인을 따라 먼 곳으로 옮겨온 플로렌스는 엄마에게 버림 받았다는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아직도 그 순간을 악몽 속에서 반복하며 자라난다.

새 주인 제이컵은 영국 고아 출신으로 얼굴도 모르는 숙부에게서 120에이커의 땅을 물려받는 행운을 잡아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하녀, 창녀, 아내 외에는 될 게 없던 비천한 신분의 영국 여성 레베카는 튼튼한 신붓감을 찾는 제이컵을 찾아 이곳으로 오고, 이 농장에는 원주민 출신의 노예 리나, 혼혈 소녀 노예 소로, 백인 남성 노예 월러스와 스컬리가 있다. 누구보다도 버림 받는 것의 고통과 배고픈 설움을 잘 아는 제이컵은 노예들과 유사가족을 이루며 자족적 공동체의 형태로 농장을 경영하고, 이에 더해 무역으로 큰 돈을 번다.

소설은 플로렌스가 1인칭 시점으로 써내려 가는 연모의 편지와 플로렌스 외의 인물들이 초점화자로 등장해 3인칭으로 구술하는 서사가 번갈아 반복되는 구조로 진행된다. 모리슨 특유의 시적이고 밀도 높은 문장들이 영어를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한 플로렌스의 부적합한 화법과 결합해 독서가 자주 지연되기는 하지만, 바로 이 지연 속에서 자유로운 흑인 대장장이를 향한 플로렌스의 열망과 절망이 독자의 내면 속에서도 폭발한다.

자비로운 농장 주인 제이컵이 전염병으로 죽으면서 다양한 신분과 인종의 여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유를 잃은 노예가 된다. 남편에게 안전하게 예속돼 있던 레베카는 종교라는 편협한 제도 속으로, 플로렌스는 사랑에 빠진 대장장이의 품 속으로, 리나는 자신을 다시는 시장에 내놓지 않기 위해 안주인의 운명 속으로 도피하려 한다.

소설의 절정은 플로렌스의 엄마가 들을 수 없는 딸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장의 독백. 읽는 이의 가슴이 요동친다. 아프리카 명문가의 딸이었던 엄마는 단지 ‘검둥이’라는 이유로 노예가 돼 마소의 새끼치기처럼 겁탈로 자식을 낳고, 그렇게 나은 딸 아이의 가슴이 봉긋해지자 주인 남자는 자꾸만 추파를 던진다. 불안으로 고통스런 어미는 가슴 속에 짐승이 없는 남자 제이컵이 나타났을 때, 거기가 딸이 가야 할 곳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사랑해서 엄마는 딸을 버린다.

“다른 이를 지배할 힘을 넘겨받는 것은 힘든 일이지. 다른 이를 지배할 힘을 빼앗는 것은 잘못된 일이고. 자신을 지배할 힘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것은 사악한 일이란다. 오 플로렌스. 내 사랑. 엄마의 목소리를 들어다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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