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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라테라노 조약

입력
2018.06.07 04:0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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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과 이탈리아가 1929년 6월 7일 라테라노 조약을 비준했다. 교황 비오11세(왼쪽)와 당시 수상 무솔리니.
교황청과 이탈리아가 1929년 6월 7일 라테라노 조약을 비준했다. 교황 비오11세(왼쪽)와 당시 수상 무솔리니.

이탈리아 왕국과 바티칸 교황청이 1929년 2월11일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고 6월7일 비준했다. 그로써 1870년 교황령을 모두 잃고 왕국에 사실상 강제 합병 당한 교황청이 비로소 독립, 오늘의 바티칸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 당시 수상 베니토 무솔리니가 맺은 조약이었다.

이탈리아는 1860년 본토와 양 시칠리아의 통일로 뒤늦게 민족국가 궤도에 진입했다. 중세 천 년 동안 유럽을 호령하던 바티칸 권력은 민족주의의 발호 속에 바티칸 언덕의 옹색한 동네 하나로 위축됐다. 신생 이탈리아가 1870년 9월 로마까지 수도로 접수하면서 교회 국가는 로마에서 사실상 소멸했다. 국제사회와 이탈리아의 신앙인들은 영적 세계의 가시적 추락을 충격 속에 주시했고, 이탈리아 국가 권력도 교황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로마 문제’라 불리던 그 불편한 상황을 타개한 게 국가파시스트 당의 당수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1922년 쿠데타로 집권해 우익 연정을 구성했지만 당내에선 소수파였다. 검은셔츠단으로 상징되는 무력으로 공산당과 사회당, 자유당의 반파쇼 운동을 진압하며 경찰국가체제를 구축해가던 그에게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다. 비오 11세에게 손을 내민 배경이 그러했다. 둘은 대리인을 내세워 20년대 중반부터 협상을 시작, 5년여 만에 합의에 이르렀다. 전문과 27개 항으로 구성된 라테라노 조약의 핵심은 바티칸을 중심으로 일정 영토와 국민, 주권을 지닌 독립국가 바티칸시국의 보장이었다. 기존 교황령 및 교회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왕국은 교황청에 현금 7억5,000만 리라와 1억 상당의 국가채권을 지불했다. 무솔리니는 라테라노 조약으로 파쇼권력의 국내 지지기반을 확보했고, 국제 정치무대에서도 박수를 받았다. 교황청은 그 돈을 시국 경제 재건과 바티칸 은행(IOR) 설립의 종자돈으로 활용했다.

2차대전 초 삐걱거리긴 했지만 교황청과 파시스트들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다. 그 시기 구축된 교황청의 관료주의 시스템은, 물론 바티칸의 안녕에는 도움이 됐겠지만, 국제 사회에 미쳐온 교황의 영향력을 왜소하게 만들었다. 교황청이 오늘의 위상을 회복한 것은 냉전기 강경 반공주의자였던 바오로 2세 치세(1978~2005)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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