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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존엄사법

입력
2017.12.10 13:26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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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명 존엄사법의 시범사업이 시작되었다. 내년 2월부터는 정식으로 시행된다. 그렇다면 이 법이 시행되면 우리는 무엇을 결정할 수 있으며,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이전에는 현대의학에 반해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가 무조건 불법이라는 대원칙만 있었다. 하지만 적용은 늘 애매했으므로 유권 해석은 판례에 의존했다. 여기서 유명한 판례가 두 개 있다. 첫 번째는 1997년 ‘보라매 사건’이다. 가망 없던 환자를 보호자가 원해 퇴원시킨 담당 의사들에게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를 인정한 판결이다. 그 후로 11년간 전국 모든 의사들은 어떤 사정이건 간에 환자를 퇴원시키지 않고, 모든 의학적 치료를 끝까지 행했다. 그리고 2008년 ‘세브란스 김할머니’ 판례가 있었다. 과다출혈로 인한 뇌손상으로 가망이 없던 환자에게 죽을 권리를 주고 싶다는 유가족의 소송이었다. 법원은 처음으로 죽을 권리 쪽에 손을 들어 치료를 중단하도록 판결했다.

이로 인해 2009년 의사협회는 존엄사를 일정 부분 인정하는 ‘연명치료 중단 지침’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지침’이었을 뿐 ‘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각 의료기관마다 상이하게 적용되었고, 여전히 판례가 뒤집혀 불법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던 끝에 장장 8년 만에 이 이슈가 법제화된 것이다. 살인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첨예한 문제임에도 개정에 이토록 오래 걸렸다.

이번에 제정된 ‘존엄사’에선 수액 치료와 영양 공급, 산소 투여 등은 중단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항암치료, 중심정맥관, 혈액투석,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등의 적용 여부다. 앞에 나열한 처치는 일반 주사를 맞거나 산소마스크를 쓰면 되는 것이나, 뒤에 나열한 처치는 굵은 주사와 특수한 기계, 고가의 비용이 필요하다. 본인의 의지로 이 침습적인 치료들을 거부할 수 있다.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의 실제는 이렇다. 모든 국민은 연명치료에 관한 의사를 사전에 밝힐 수 있다. 서류는 두 가지가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가정 아래 작성할 수 있는 것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이다. 이 의향서가 있다고 무조건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서류를 작성한 건강한 사람이 심근경색으로 심정지가 발생했을 경우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살인방조나 과실치사다. 모든 생존 가능한 인간은 현대 의학이 제공하는 의술로 최대한의 생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의향서를 작성한 건강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의식을 잃어도,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 아래 침습적인 치료는 행해지게 된다. 다만 의료진이 환자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할 때만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의미가 있다. 그러니 의향서가 의미를 발휘하게 된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명의료계획서’는 불치병에 걸렸을 때 의식이 있다면 작성할 수 있고, 이로서 생명을 연장하는 처치보단 존엄사를 택할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도, 불치병에 걸렸다면 다시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 법의 골자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법적으로 처치를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이 지점에 있다. 그럼에도 어떤 환자든 기본적 처치는 받아야 한다. ‘연명의료계획서’가 작성되어 있지 않으나 의식이 없는 경우, 의사 2인의 동의와 가족의 의견 일치만 있으면 된다.

결론적으로 이 법률로 달라진 점은, 그전까지 임의로 적용하던 존엄사의 허용 여부를 법으로 제정해서 기준을 긋고, 누구도 법의 경계에서 불안해하지 않는 죽음의 권리를 찾아주겠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문서화된 법으로 논의하겠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 늦은 첫걸음을 환영한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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