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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청춘을 멋대로 재단하지 말라

입력
2015.05.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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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청년에 대한 신조어가 쏟아져 나온다. 올해도 어김 없다. ‘3포 세대’가 아니라 이젠 ‘5포 세대’다. 더 어려워진 현실을 강조하듯 ‘5포’로 진화했다. 연애,결혼,출산은 물론이고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추가. ‘취업 스펙 9종 세트’, 서른 넘어서까지 부모님 등골 빼먹는 ‘빨대족’ 등등. 청년의 현실에 이름 딱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따갑고, 아픈 이름들이다.

닳을 대로 닳은 불행. 이름표만 갈아 끼우는 느낌이다. 통계적으로 나아지는 것은 없다. 실업률은 10%를 넘어섰다. 직장에도, 학교에도 적을 두지 않은 니트족 청년이 147만명에 달한다. 이런 건 다들 처음이다. 청년기는 항상 가장 활동이 왕성한 시기였다. 무기력이나 절망이란 이름표를 단 적이 없었단 얘기다. 청년 군에 속한 나는 모순된 시선을 동시에 느낀다. 이 나라의 미래이자, 이 나라의 새로운 걱정. “힘을 내라!”는 소리를 반복해서 듣는 기분이다. “힘낼 수 없겠지만” 이란 말을 덧붙여서 말이다.

힘내라는 말은 긍정의 말이다. 상황이 덜 힘들때야 응원의 말이겠지만, 정말 힘낼 수 없는 상황에선 긍정의 말도 폭력일 수 있다. 분명 청춘에 대한 사회의 응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때도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책 선물을 받았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긍정과 응원의 말이었다. 그 때는 그런 응원이 가능했다. ‘아프니까 청춘이야. 힘내. 힘내서 더 해, 임마!’ 오 년만에 그 기억은 희미해졌고, 다들 언제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냐는 듯 비꼬았다. 지금은 책 저자인 김난도보다 유병재의 외침이 기억에 더 선명하다. “아프면 환자지, xx야.”

많이들 소진됐다. 많이 노력한 것 같은데 아직도 ‘보통의 존재’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박탈감이 찾아온다. 아침 조례시간에 들은 선생님 말씀을, 어깨 너머 친척에게 얻어들은 괜한 소리들을, 너무 잘 기억한 게 잘못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보통의 대학생이 되려고 야자하고 보통의 직장인이 되려고 토익 보고. 힘들여 참고, 지금의 즐거움을 유예하라고 배웠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그 뒤에 더 찬란한 게 있을 거라고.

"아프면 환자지. XX야" 유병재의 말이 웃프다. SNL의 한 장면.
"아프면 환자지. XX야" 유병재의 말이 웃프다. SNL의 한 장면.

참고 참고 또 참아도 또 다음 과업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나 뿐만은 아닐 거다. 보통의 직장인이 되고 나면 보통의 가족을 꾸리고, 보통의 집을 사려고 대출 받고... ‘이렇게 퀘스트 수행하다 만날 끝판왕은 죽음이란 놈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는 현재의 즐거움을 유예하고 더 높은 곳으로 부추기면서 애들을 키운다. 불안을 채찍으로 쓴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지 못하면 미래는 없어. 요즘 대학 안 나온 사람이 누가 있니."

불안을 부추기는 목소리들. 지금이 아니면 ‘보통’의 삶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게 예전엔 잘 먹혔을 주문들인데, 요즘 청년들에겐 약빨이 떨어진 것 같다. 끝없이 현재를 유예해도 과실이 떨어지질 않으니까, 이제 속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도 힘들고 저렇게 살아도 힘들 거라면 내 맘대로 살겠다는 선언. 스탠다드한 삶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고 있다.

얼마 전 만난 지인은 ‘탈서울’을 꿈꾼다고 했다. 대학 합격 후 상경할 때까지만 해도 ‘인서울’의 꿈을 이뤘다며 모두들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치만 서울살이 7년 후, 지금 다시 돌아보면 오히려 상황이 역전됐다. 그녀는 4년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일반 회사 입사를 다시 준비했다. 미술계로는 취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취업 7종 세트를 준비하면서 기가 질렸다. 영어에 컴퓨터활용능력시험에 준비할 게 뭐 그렇게 많은지 시험비만 다달이 10만씩 들었다. 그녀를 부러워했던 친구들은 지방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결혼자금도 모으고 있었다. ‘인서울’하라는 말, 대학에 가야한다는 말, 취업 7종 세트를 준비해서 취업을 해야 한다는 말 모두 그녀를 점점 힘들게만 만들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만큼이나 일반적인 길 또한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나 저러나 망한 거 같은데, 얄팍한 안정성에 목매지 말자고, 스탠다드한 삶을 벗어나자고 결심했다. 하고 싶었던 미술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녀는 이 공부가 끝나면 서울을 탈출할 생각이다.

사회에서 제시하는 표준의 삶을 살아도 행복하기가 힘들다는 걸 알고 나면 굳이 참을 필요가 없어진다. 성공의 신화를 간직한 사람들은 끝까지 레이스를 뛰고, 그런 성공을 믿지 않기 시작한 사람들은 레이스를 벗어나기로 한다. 더 이상 자기 행복을 미루지 않고, 참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시대는 청년에게 절망과 무기력의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시대의 절망 한 켠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기는 1명만 행복한 사회가 아닌, 지는 9명도 행복하게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구조를 생각할 때다. 게티이미지뱅크
이기는 1명만 행복한 사회가 아닌, 지는 9명도 행복하게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구조를 생각할 때다. 게티이미지뱅크

청년 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파이팅을 강요하거나, ‘절망 세대’로 진단하는 것. 전자는 모욕 같고, 후자는 모자라다. 더 나아갈 지점이 있다.

청년 문제는 징후다. 이전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며 새로운 면역 체계가 필요해 앓는 몸살이다. 병을 앓는 당사자는 청년이지만 병을 앓는 원인은 청년 세대가 제공한 것이 아니다. 병을 극복하는 새로운 면역 체계도 청년 혼자 시름시름 앓는다고 얻어질 게 아니다.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왜 보통의 삶을 얻는 과정이 불행해야 하는지. 불안이 우리를 새로운 길로 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면 이 불안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지. 그 고민을 시작한다는 생각에서 청년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일자리를 쪼개서 일자리를 만들고, 청년에게 눈 낮추라 훈수 두며 ‘보통의 삶’ 자체를 깎아내리는 방향을 택했다. 체질 개선과는 거리가 멀다. 이기는 1명에게만 행복할 권리를 주는 사회구조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는 9명도 행복하게, 보통의 삶을 살 수 있게. 청년 문제에서 다음 세대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하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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