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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심해지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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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 심해지는 미국

입력
2015.09.0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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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정부 당시 홀더 법무차관

기업인 기소에 '부작용 고려' 원칙

이후 보수적 부시정부 거치며

부정한 기업인 탈출구로 변질돼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맷 타이비 지음ㆍ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544쪽ㆍ2만2,000원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 맷 타이비 지음ㆍ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544쪽ㆍ2만2,000원

2012년 미국 법무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한 다국적 금융회사의 불법행위를 발표했다. 영국계 회사인 홍콩상하이은행(HSBC)이 멕시코와 콜롬비아의 마약 조직과 미국이 지정한 테러지원국 등을 위해 수십억 달러의 자금 세탁을 해줬다는 내용이었다. 은행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는 비판이 나왔으나 회사 관계자 누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19억달러의 합의금을 낸 게 전부였다.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지만 매년 220억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은행에 그리 타격이 될 돈은 아니었다. 국가경제에 해를 줄 경우 되도록 관대하게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미국 관가의 불문율에 따른 결과였다.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는 이런 법 적용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강한 의문을 던진다.

대형 회사에 대해 무르기만 한 법이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엄격하게 적용된다. 책은 20대의 떠돌이 청년 토리 매런 등의 억울한 사례를 든다. 10대 후반부터 거주지가 딱히 없었던 매런은 공원에서 하룻밤을 지내다 수배자가 되는 상황을 맞아야 했다. 200달러 정도의 범칙금을 내야 할 상황에 흥분해서 경관에게 거친 말을 내뱉었다가 공무집행방해죄와 치안문란죄까지 뒤집어썼다. 매런은 유치장을 나온 뒤 예정된 법원 출석 일을 지키지 못해 도망자 신세가 됐다. 그러다가 불심검문에 걸렸고 교도소행을 피하지 못했다. 가난이 죄였다. 책은 이렇게 대형 회사와 별 볼일 없는 사람에 대한 공권력의 이중적인 처분을 상세히 묘사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변질된 미국의 사법질서를 고발한다.

법 앞의 평등이 잘 구현된 국가로 인식되던 미국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책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에릭 홀더 법무부 차관이 제시한 ‘기업 기소의 부수적 결과’를 주목한다. 홀더는 화이트 칼라가 저지른 범죄를 엄단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할 대비책도 고려했다. “범죄 혐의가 있는 대기업을 살필 때는 죄 없는 사람들에도 눈길을 돌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대기업 수사에 따라 주가가 폭락해서 큰 손해를 보게 될 주주들, 기업 수사로 직장을 잃게 될 직원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홀더의 이런 방안은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거치며 부정한 기업들에게 탈출구가 되었다. 2005년 네덜란드계 회계법인 KPMG는 갑부들을 위해 불법적인 절세 혜택을 제공해 25억달러가 넘는 세금을 빼돌린 혐의로 단죄를 받게 됐으나 부수적 결과를 우려한 여론에 의해 솜방망이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KPMG를 기소하면 1만8,000명의 실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KPMG는 형사기소 대신 벌금 4억5,600만달러를 내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기업 기소의 부수적 결과’는 더욱 힘을 얻었다. 시티그룹과 골드만삭스, 웰스파고 등 대형 은행들이 국가경제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불법적인 영업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받지 못했다.

책은 서문에서 가난하면 죄가 되는 부조리한 현실을 미국의 범죄증감과 수감률을 비교해서 표현한다. 최근 20년 동안 미국의 폭력범죄는 급격히 줄었으나 수감률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비폭력 범죄 수감자가 급증한 결과다. 떠돌이 매런처럼 공원에서 잠을 자다가, 생활비를 대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복지급여를 받았다가 감옥 신세를 지는, 가난이 만든 죄가 급속히 늘고 있다는 것이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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