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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에밀리 홉하우스(4.9)

입력
2018.04.09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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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2차 보어전쟁기의 영국인 인권평화운동가 에밀리 홉하우스가 1860년 오늘 태어났다.
20세기 초 2차 보어전쟁기의 영국인 인권평화운동가 에밀리 홉하우스가 1860년 오늘 태어났다.

‘보어(Boer)인’은 16세기 가톨릭 종교박해를 피해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신교 네덜란드인과 후손을 일컫는 말이다. 저 낱말은 영국 식민지 시절 ‘미개하고 가난한 2등 백인’이라는 뉘앙스가 스민 멸칭으로 변질되면서 이제는 ‘아프리카너’ 같은 중립적 단어로 대체됐다. 그들은 줄루족 등 원주민을 몰아내고 19세기 중엽 지금의 남아공에 오렌지자유국, 트랜스발공화국을 수립했다가 제국주의 영국과 두 차례 전쟁 끝에 패배, 남아공에 흡수됐다.

모든 전쟁이 참혹하지만, 1899~1902년의 2차 보어전쟁 당시 영국이 운영했던 보어인 강제수용소는 2차 세계대전 나치 수용소와 홀로코스트의 원형으로 불릴 만큼 잔혹했다. 영국군은 보어인과 저항 흑인 거주지역을 몽땅 불태우고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34개 강제수용소에 수용했다. 포로도 아닌 그들은 사실상 방치됐고, 굶주림과 영양실조, 학대와 전염병으로 약 3만 명이 숨졌다. 나치의 적극적 ‘멸절’과는 달랐지만, 사실상의 홀로코스트였다.

영국 여성 에밀리 홉하우스(Emile Hobhouse,1860.4.9~1960.6.8)는 수용소 현지에서 그들을 돕고, 현장의 참상을 영국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고발하며, 보수당 제국주의자들의 위선과 만행을 성토한 박애ㆍ평화주의자였다.

성공회 사제의 딸로 콘월에서 태어난 그는 30대 중반 성공회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미국 미네소타로 건너가 현지 광부들의 생존권 운동을 돕는 등 인권활동가로 일했다. 1898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보어전쟁이 터지자 야당인 자유당의 남아공 화해위원회 여성조직 담당자로 파견, 보어인들의 현실을 현장에서 보게 된다. 전투원도 아닌 여성ㆍ아동이 겪는 참상을 목격한 그는 귀국 후 그들을 돕는 모금운동을 벌였고, 자신이 본 수용소가 한두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적행위를 한다는 비난 속에 반전ㆍ반제국주의 활동가로 거듭났다. 그는 전쟁 말기인 1901년 영국과 남아공 입국이 거부돼 프랑스에 거주하기도 했고, 거기서 자신이 본 전쟁의 진실을 책으로 썼다.

전쟁이 끝난 뒤로도 그는 보어인 여성ㆍ어린이를 위한 구호ㆍ복지 및 자활을 돕는 데 헌신했고, 1차대전에도 반대했다. 그의 유해는 강제수용소가 있던 남아공 블로엠폰테인 국가여성기념탑에 안장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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