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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교내대회 수상에 혈안… 학교는 편법 써서 상장 남발

입력
2014.10.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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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서 학생부 비중 계속 확대, 교내 입상 실적이 합격 열쇠로

교장 재량 시상에 학부모 입김, 특정 학생 밀어주기 의혹까지

올해 1학기 A고에서는 교내 경시대회인 영어토론대회가 열렸다. 상대방과 영어로 토론을 해 어느 쪽이 더 잘했나를 평가하는 대회인 만큼 이긴 쪽은 올라가고, 나머지 한쪽은 떨어지는 토너먼트였다.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32강, 16강, 8강, 4강, 결승 등의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그런데 학교는 대회 규칙을 갑자기 바꿔 4강까지 가는 과정을 토론 없이 원고로만 심사했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4강에 들어간 학생들을 대상으로 결과에 따라 금상 1명, 은상 1명, 동상 2명을 선정해 시상하는 것뿐이었다. 갑작스러운 규정 변경을 놓고, 지난 대회에서 상을 받았던 2학년 학생이 문제를 제기하자 학교 측은 “시간이 없어 방식을 바꿨다”고 해명했다.

학교의 갑작스러운 방식 변경에 일부 학부모는 해당 교육청에 ‘학교측이 일방적으로 대회 규칙을 바꿔도 되는지’ 문의했다. 규칙 변경이 부당하다는 항의와 하소연이었지만, 교육청의 대답은 “교내 상은 학교장 재량으로 주는 것이어서 교육청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한 학부모는 “대외 수상실적을 학교생활기록부나 자기소개서, 추천서에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영어토론대회는 교내 경시대회 중 가장 관심이 높은 알짜배기 대회”라며 “입시에 반영되는 중요한 교내 대회인데 막무가내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는 현재 우리 학교 현장에서 학생과 학부모들이 스펙에 얼마나 의지하고 민감해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학생 선발 시 주요 자료가 되는 학교생활기록부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내 아이의 입시를 위해서라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서슴지 않는 부모들과 학생들에게 스펙으로 활용될 수 있는 입상 실적을 올려주려는 학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학교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학생들에게 유리한 ‘고무줄 잣대’가 적용된다. 입시에 목맨 교육이 보여주는 서글픈 단면이다.

학교 현장이 온통 스펙 쌓기에 혈안인 이유는 대학 입시에서 학생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전체 모집인원 대비 학생부 중심 전형 비중은 2014학년도 44.4%에서 2015학년도 55.0%, 2016학년도 57.4%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수능 최저학력 기준마저 없애고 학생부종합전형(옛 입학사정관 전형)으로만 뽑는 대학들도 속속 등장하면서 수험생들의 학생부 기재용 스펙쌓기 경쟁은 더욱 심해졌다. 학생들의 특성을 일일이 살펴볼 수 없는 대학들도 전적으로 학생부에 의존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학생 선발 과정에서 학생의 잠재력과 가능성 평가를 학생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학교와 학생들은 교내 경시대회 등을 통한 수상실적으로 학생부를 풍성하게 만드는 게 최대 관심사다. 실제 대부분의 고등학교는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 교내 경시대회를 늘려 수상자를 양산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B일반고의 경우 교내 영어경시대회만 6~7개에 달한다. 영어 작문대회, 말하기대회, 커뮤니케이션대회, 어휘ㆍ단어대회, 듣기대회, 영어 사용자제작콘텐츠(UCC)대회, 팝송부르기 대회 등으로 최대한 쪼개놓았다. 서울의 공립 C고는 종횡무진독서교육, 진로독서체험발표대회, 진로독서체험경진대회, 진로독서토론대회, 독후작품경시대회 등 독서 관련 경시대회를 이름만 조금씩 바꿔 운영하고 있다. 이 밖에 많은 학교에서 ‘수학여행 공동체활동상’, ‘성폭력 모의재판대회 상’, ‘나의 꿈 발표상’, ‘응급구조 체험상’ 등 학생들에게 노골적으로 상을 주기 위한 대회와 실적을 만들고 있다.

심지어 경기 D외고는 ‘기숙사 자랑상’을 만들어 기숙사 생활에서 벌점 없는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이 외고에 다니는 한 학생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노골적으로 상을 많이 주는 게 보인다”고 말했다.

상도 두루 받도록 하는 것도 원칙 아닌 원칙이다. 교과 관련 상은 학생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성취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학생부 기재만을 목적으로 상을 얹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교사들은 털어놨다. 금ㆍ은ㆍ동상을 주면서 최우수상을 만드는가 하면 금ㆍ은ㆍ동상 외에 장려상만 10여명에게 준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E일반고 교감은 “대학들은 교내 경시대회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전체 응시자 중 몇 등으로 무슨 상을 받았는지 요구한다”며 “전체 응시자 수를 늘리기 위해 관심 없는 아이들도 억지춘향 식으로 끼워 넣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수상실적 옆에 등수만 적기 때문에 어떤 대회는 1등이나 금상만 5~6명이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교내 경시대회가 난립하면서 상의 희소성과 변별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이를 바탕으로 쓴 학생부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서울 F외고 2학년 윤모(17)군은 “선생님들이 학생 진로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학생부에 들어갈 내용을 직접 써오면 넣어주겠다는 분들도 있다”며 “독서 사항의 경우 책을 읽지 않고, 인터넷 검색한 내용으로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또 경기의 G외고 임모(17)군은 “원칙적으로 외부 수상실적은 쓸 수 없지만 그걸 활동사항에 쓰기도 한다”며 “교외 중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상을 탔는데 ‘중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1,000자로 원고를 작성해 어느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실력이 향상됐다’는 식으로 써서 학생부를 늘린다”고 털어놨다. 구체적인 성적을 기재할 수는 없지만 외부 경시대회에 참여했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스펙 쌓기’의 꼼수는 언제든지 입시비리로 연결될 수 있다. 최근 대입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가짜 스펙을 기재해 대학에 부정 입학한 학생이 경찰에 적발된 사건(본보 9일자 9면 기사보기)이 대표적이다.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부모가 거액의 돈을 쓰고, 교사는 돈을 받고 수상경력과 봉사활동 등의 기재사항을 허위로 작성해 준 부정입시의 전형이다. 이 학부모는 경찰조사에서 “강남에서는 다 이렇게 한다는데 왜 나만 문제 삼느냐”고 항변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고교 교사는 “이번 사건은 극단적인 경우로 봐야 하지만 학생부가 더욱 중요해지면서 학생부 실적을 최대한 늘리려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요구가 빗발치는 현재의 교육 현실을 감안하면 다른 학교들도 부정의 유혹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양진하기자 real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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