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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홀에 빠질 듯, 위태로운 광자의 삶… 희망의 빛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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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홀에 빠질 듯, 위태로운 광자의 삶… 희망의 빛은 어디에

입력
2015.07.1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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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깨끗한 애였어요. 잡티 하나 없는. 순수한. 정말 열심히 살던 애였어요.”

“그X은 XX에요. 그리고 XXX이었어요. 젊고 예쁘고 생기발랄하고 다 좋은데 몸을 함부로 굴리는 건, 그건 정말 아니지 않아요?”

골연화증에 시달리는 광자가 반지하 월셋방에서 ‘햇빛 샤워’를 하는 장면. 햇빛을 못 보고 사는 밑바닥 인생을 통해 우리 시대 희망을 묻는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골연화증에 시달리는 광자가 반지하 월셋방에서 ‘햇빛 샤워’를 하는 장면. 햇빛을 못 보고 사는 밑바닥 인생을 통해 우리 시대 희망을 묻는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같은 인물이건만 그녀를 “예쁘고 친절하고 막 피부가 빛이 나는” 이웃집 여자로 기억하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체계도 경력도 무시하고 막 치고 올라가는 개또라이”로 기억하는 직장 동료도 있다. 여자의 이름은 광자(光字). “술로 죽고 담배로 죽은” 부모가 “무책임하게 붙여준” 그 이름이 학창시절 미친년(狂者)으로 불리면서 인생이 꼬였다고 믿는 광자는 자신을 미친년이라 부른 친구를 면도칼로 그어 진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9일부터 26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햇빛 샤워’(장우재 작.연출)는 밑바닥 인생을 통해 우리 사회의 희망 없음을 그리는 한편, 그 희망 없음을 견디는 인간에게서 다시 희망을 발견한다. 고시원을 배경으로 빈곤한 삶을 다룬 장씨의 전작 ‘여기가 집이다’의 한 장면에서 착안한 신작은 주인공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 형식을 통해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

막이 오르면 무대 위엔 ‘추락주의, 씽크홀’이라는 경고판이 서 있다. 팍팍하지만 평온한 일상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다음 장면을 예고하는 것처럼. 싱크홀 주위를 빙빙 도는 아저씨 앞을 광자가 막아선다. “왜 이래?” “이름 바꾸려고요.” 광자는 출소 후 이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뀔 거란 생각으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개명 브로커를 찾아간다. 어떻게든 상류사회로 올라가려는 광자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똑같이 하루 몇 시간씩” 주어지는 햇빛 누릴 시간이 없어 골연화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광자 앞에 집주인의 양아들 동교가 나타난다. “아무 관계도 아닌 채로 살다가 아무 관계 없이 가는 게 목표”인 동교는 “아무 관계가 아니라서” 광자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과 그의 어의 없는 자살이 그녀의 일상을 뒤흔든다.

작품의 메시지는 2015년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해도 문제될 것 없어 보인다. 광자의 마지막 반전을 ‘한 장면’으로 꼽을 만하지만, 너무 친절하고 논리적이어서 여운이 적은 것이 아쉽다. 하지만 이 당연한 메시지를 110분간 집중하도록 만든 연출력은 미덕이다. 데뷔 21년 차 연출가는 싱크홀처럼 꺼진 광자의 방으로 그녀의 앞날을 암시하고, 백화점 마네킹으로 분한 인물들을 통해 팍팍한 우리 삶을 은유하며, 한없이 우울한 이야기가 지칠 때쯤 무대 미학을 살린 인물들의 인터뷰 장면으로 관객의 관심을 모은다. 캐릭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김정민(광자 역)의 설익은 연기는 작품 몰입을 방해하지만, 발랄한 발성으로 80년대식 유치한 대사를 2015년 감성으로 바꿔놓는다. (02)758-2150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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