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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상한다고

입력
2014.10.3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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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성향이었던 이인호(사진) KBS 이사장이 우파로 진영을 옮기면서 역사학자가 견지해야 할 합리성ㆍ객관성을 저버렸단 비판이 나온다. 최근 잇단 극우 발언에 근거해서다. 조부의 친일이 좌파에 의해 공론화하자 자부심이 상하고 배신감도 느꼈으리란 게 대체적 짐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진보 성향이었던 이인호(사진) KBS 이사장이 우파로 진영을 옮기면서 역사학자가 견지해야 할 합리성ㆍ객관성을 저버렸단 비판이 나온다. 최근 잇단 극우 발언에 근거해서다. 조부의 친일이 좌파에 의해 공론화하자 자부심이 상하고 배신감도 느꼈으리란 게 대체적 짐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좌(緣坐)는 헌법이 금한다. 하지만 친족의 죄가 없어지진 않는다. 은폐와 부인은 다르다. 편 따라 바뀌는 게 사실인가. 자존심 상해도 양심은 챙길 일이다. 양아치보단 꼴통이 낫다.

““내 조부가 친일이면 일제강점기 중산층은 다 친일파”라는 이인호 KBS 이사장의 강변(强辯)을 듣고는 생각난 단어가 지조와 절개다. (…) 비단 일제강점기 때만이 아니라 건국 이후 근 반세기에 가까운 독재의 시기에도 진딧물의 단물을 빠는 개미처럼 처신한 이 땅의 지도층, 지식인들은 수없이 많다. (…) 시대가 만든 비극이기도 하고 그 비극적인 시대에 산 사람들이 한편으로 측은하기도 하지만 가려내고 단죄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시종일관적이었던 골수 친일파보다 육당이나 춘원처럼 중도에 변신한 민족지사들이 더 욕을 먹는 것도 지조와 절개를 버린 데 대한 분노심 때문일 게다. 그들은 광복 후에도 친일 경력을 깨끗이 세탁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귀의하는 ‘멋진’ 변신술을 보여 주었다. 변신은 현재 권력이나 사상과의 일종의 타협인데 지난 수십년간 권력 이동과 이념 투쟁의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 가장 희극적인 전향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하던 주사파가 이른바 뉴라이트의 한 축으로 변신한 것이다. 반미종북의 선봉에서 극단을 달리던 그들은 뉴라이트로 짐을 옮기고 나서도 시선만 정반대 방향을 바라볼 뿐 똑같이 극단을 달리고 있다. 그들의 방향 전환은 주지하다시피 공산주의의 몰락에 따른 정신적 붕괴의 결과다. 좌파로서는 기회주의적 변절이요 배신이다. (…) 이 이사장도 변신과 전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세대 러시아사학자로서 이 이사장의 성향은 원래 중도 진보였다고 한다. (…)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황모씨의 석방을 위한 탄원서에는 자신 때문에 서양사학과를 택했다는 최영미 시인과 동참하기도 했다. (…) 그랬던 그가 돌연 뉴라이트의 선두에 서서 바뀐 정부의 공영방송 이사장직에 오르고 ‘대한민국 공로자로서 김구 선생을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은 소련의 지령이었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의 이런 변신은 조부의 친일이 공론화된 뒤부터인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이 이사장이 자존심이 상해 반대편으로 돌아섰을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민주주의에서 신념의 자유는 보장되지만 정권과 시류에 영합하는 신념은 타인의 믿음을 얻지 못한다. 한국에서 ‘돈’과 ‘높은 자리’로 매매되지 않는 게 뭐가 있겠느냐는 어느 교수의 말은 과격해도 팔순을 눈앞에 둔 이 이사장의 ‘노욕’(慾)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친일과 뉴라이트, 그리고 기회주의(서울신문 기명 칼럼ㆍ손성진 수석논설위원) ☞ 전문 보기

“지난달 ‘한국방송’(KBS) 이사장이 된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언들이 우리의 역사의식을 흔들었다. 이 이사장은 친조부 이명세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는 중에 “할아버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일제 통치 체제하에서 타협하며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보면 이 이사장의 조부 이명세는 천황을 떠받드는 황도유학을 주창하고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찬양했다. 일제 말기 징병제를 환영하기도 했다. 이명세의 친일은 타협이 아니라 명백한 부역이다. (…) 더 곱씹어볼 것은 조부의 친일 행위가 ‘유학의 세’를 늘리려는 것이었다고 변명한 대목이다. 유학의 세를 늘릴 수만 있다면 일제에 충성하는 것도 괜찮다는 뜻일 터인데, 아무리 봐도 이것은 유학의 정신에 맞지 않는 말이다. 유학의 정신, 다시 말해 선비정신이란 게 뭔가. 인의예지, 더 줄이면 인과 의를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 독립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인 일제에 빌붙어 유학의 세를 키우려 했다니, 유학의 속을 파내버리고 껍데기를 키우겠다는 얘기다. 자가당착이고 언어도단이다. (…) 이 뒤틀린 사고가 보여주는 건 ‘유학의 세’를 명분으로 삼아 자기 자신의 세를 키우겠다는 권세욕 아니겠는가. (…) 이 이사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경련 강연에서는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까지 했다. 한민족 절대다수의 염원이 한순간에 스탈린의 하명이 되고 말았다. (…) 집안의 명예를 지키겠다며 당치도 않은 말을 끌어다 대는 것은 조상을 두 번 치욕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일이다. (…) 선비의 지조가 그리운 시절이다.”

-이인호, 이명세, 친일유학(10월 10일자 한겨레 ‘아침 햇발’ㆍ고명섭 논설위원) ☞ 전문 보기

요절자 부고는 윤색된다. 미인박명이랬다. 애틋함도 보태진다. 감안해도 마왕 족적은 또렷하다. 위악으로 광신도를 거느렸다. 늘 선도했다. 음악뿐 아니다. 신념만이 그를 움직였다.

“음악 담당 기자를 하면서 신해철의 부음(訃音)을 쓰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는 젊은 데다가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고, 달변이면서도 냉철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생각지 않던 삶의 종(終)을 맞을 수 있겠으나, 늘 쾌활하고 수다스럽던 그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슬프고도 낯설다. TV와 라디오에서 독설(毒舌)로 이름났고, 호불호가 명백히 갈렸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다. (…) 그러나 ‘노무현의 사람들’로 뭉뚱그려지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실 2002년 대선 당시 386세대에게 신해철의 노무현 지지는 좀 생뚱맞은 일이었다. 1968년생이고 서강대 87학번인 그 역시 386세대였다. 그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대학가요제에 나간 것이 1988년이다. 386세대들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우민화(愚民化)의 최고 상품으로 유치한 이벤트’라고 불렀던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그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라고 노래했다. 지금 대학생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당시에 ‘서강대씩이나’ 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은 ‘백만 학도’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대학에서는 오로지 운동가요만 음악으로 통했다. 팝송은 ‘제국주의 음악’이었고 유행가는 ‘투쟁 의지를 약화시키는 사랑 타령’이었다. 서강대 출신 한 선배는 “양희은(서강대 사학과 출신)은 서강의 자랑, 신해철은 서강의 수치”라고 말하기도 했다. (…) 신해철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 “나는 386세대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요. 88년에 대학가요제 나가서 사랑 타령을 했으니 말이죠. (…) 그렇지만 음악을 너무 좋아했고, 대학에 가면 제일 먼저 해보고 싶었던 게 대학가요제였어요. 그래서 후회는 안 해요. 오히려 눈치 보느라 대학가요제에 안 나갔더라면 평생 후회했을 거예요.” 오늘 그의 데뷔곡 ‘그대에게’를 다시 들어봤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그 전주(前奏)는 대단히 빼어난 작품이다. 에어쇼에서 홀로 솟구치는 제트기, 급류를 앞두고 서서히 빨라지는 래프팅 코스를 연상시키는 그 악절은, 듣는 이를 사로잡아 메인 멜로디로 이끌어가는 전주의 역할을 100% 해낸다. 열정을 오랜 시간 증류하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멜로디다. (…) 밴드 ‘넥스트’로 자신의 음악 출발점인 프로그레시브 메탈 오페라를 성취한 그는 윤상과 함께 만든 작품을 내놓으며 ‘노땐스 골든히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댄스그룹이 창궐하던 당시를 풍자한 이 음반은 당시 영미권의 최첨단 음악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명반이었다. (…) 록과 일렉트로닉이란 굵은 줄기로 뻗어가면서 자잘한 재미와 위트를 선보인 그는, ‘좌파 연예인’이 아니라 한국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哀悼(애도), 음악가 신해철(조선일보 ‘한현우의 팝 컬쳐’ㆍ문화부 차장) ☞ 전문 보기

“한국 가요계에서 조용필은 가왕(歌王), 신해철은 마왕으로 불린다. 신해철이 ‘무한궤도’로 대학가요제에 나갔을 때 심사위원장이 조용필이었다. 마왕은 가왕의 도움으로 첫 앨범을 냈다. 그리고 솔로와 넥스트의 리더로 ‘그대에게’ ‘날아라 병아리’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안녕’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인형의 기사’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등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마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마왕답게 정치적 성향을 과감하게 드러냈고, 사회적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성동본 연인들을 위해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불렀고, 환경보호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방송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간통죄 폐지, 학생 체벌 금지, 대마초 흡연 허용 등을 주장했다. 영어 몰입 교육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강한 카리스마, 거침없는 독설과 입담으로 광신도를 거느렸다. “기본적인 게 뒤틀렸어요. 강물이 오염됐으면 어디서부터 썩었는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해요.” 음악적으로 천재였고 인간적으로 담대했던 ‘마왕’ 신해철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방송마다 신해철이 생전에 “내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질 곡이고 노래 가사는 내 묘비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민물장어의 꿈’이 흘러나오고 있다.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굿바이, 마왕!”

-‘마왕’ 신해철(10월 29일자 경향신문 ‘여적’ㆍ김석종 논설위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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