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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림자보다 가벼운

입력
2015.07.2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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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절정이다. 덥다. 같이 있는 사람의 훅! 하는 입김에도 몸을 슬쩍 뒤로 뺀다. 마당에 묶인 강아지 달빛이는 얼굴보다 길게 혓바닥 늘어뜨리고 제집 밑으로 구덩이 파고 들어앉는다. 허공에 좌판을 벌인 거미는 가게 비우고 낮잠 자고 옥수수 꽃술에 앉은 잠자리도 미동 않는다. 이맘때는 모두 자신의 거처를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런데 가만 보면, 움직이는 것들에게는 지치고 힘든 태양의 날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들에겐 풍요와 성숙의 계절이다. 어미의 보호색에서 벗어난 사과는 주먹만 한 얼굴에 홍조 띠고 처녀티를 내기 시작한다. 알몸 참외는 땡볕 아래 배꼽을 내놓고 노랗게 익어간다. 초록치마 입은 참깨는 하얀 꽃을 머리에 달고 땅속 감자는 벌써 세상 밖으로 나오고 고구마는 무럭무럭 자란다.

고만고만한 농부의 쉰둥이로 태어나 들강아지와 별반 다르지 않게 개천이고 산이고 쏘다니다 저녁이나 먹으러 집으로 돌아오는 막둥이. 공부로는 당최 자랑할 것이 없고 더러 미꾸라지 송사리로 저녁 찬거리 보태고, 개구리 잡아 뒷다리는 구어 먹고 몸통은 가져다가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으로 밥값하며 커가는 꼴이 늙은 부모 눈엔들 흐뭇했겠는가?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근심과 사랑이 서울로 가는 짐을 쌌다. 먼저 올라와 무지하게 공부를 잘하는 형의 쪽방에 빈객으로 청운의 뜻을 품어보고자 했으나 부모님은 쉰둥이에게 그런 천성은 물려주지 않았다. 방학만 하면 새총에서 튀어나온 콩알보다 빠르게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했다.

그때는 푸른 벼 포기 아래 찰랑이는 논물 속에 우렁이가 참 많았다. 흙물을 뒤집어쓰고 고요하게 엎드려있는 놈을 불쑥불쑥 손 넣어 건져 모닥불 피워 구워먹기도 하고 된장국에 넣기도 했다. 그런데 팥톨 만한 새끼들이 자잘하게 깔려있는 벼 포기 밑에 커다란 우렁이가 밑이 빠져 둥둥 떠 있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야! 여기 우렁이 엄마 뱃놀이 한다’고 깔깔 웃으며 휙 던져 버렸다. 제 몸에 새끼를 가득 키운 어미가 그것들을 뱃속에서 내 놓고 빈 껍질이 되어 물 위에 떠 있는 것이라고 어머니가 말해도 그것마저도 재미있는 얘기로 듣고 킥킥 웃었다.

우리 동네는 한 열 가구쯤이 산중턱과 꼭대기 여기저기에 흩어져 산다. 우태복 할아버지는 그 중 아래쪽에 농가를 개량한 구식 현대주택에 혼자 사신다(요즘 도시나 농촌이나 혼자 밥을 해먹는 노인이 우태복 할아버지 뿐이랴만). 그런데 요즘은 약주를 자주 하신다. 남은 막걸리 병을 흔들어본다. 혼자 사니 혼자 마신다. 주름투성이 얼굴이 노을보다 붉어지면 허적허적 그림자처럼 걸어 이백여 그루 사과나무가 심어진 과수원으로 가서 넋 없이 바라본다. 자식들 대처 보내며 하나 둘 팔고 마지막 남은 과수원을 두 달 전에 팔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돈을 아들딸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이제 노인은 농부이며 농부가 아니다. 노인은 속을 다 비워낸 우렁이 되어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무엇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무엇이 삶을 쓸쓸하게 하는 것인가. 아버지의 세월을 먹고 자란 나도 머지않아 웃으면서 집어 던진 빈 우렁이 되어 저 생의 밭머리를 쓸쓸하게 바라볼 것이다. 뒤늦게 아는 것이 가장 먼저 아는 것이라는데, 나는 자꾸 우태복 할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아닌가 생각되어 가슴 먹먹하다. 건강 생각하셔서 고만 잡수시라고 말씀드릴 용기가 없다. 차라리 그 빈 잔에 뿌연 막걸리를 묵묵히 부어드리고 싶다.

그래서 이런 생각 한 번 해보았는데 어떤가. 이번 휴가는 어린 아들 딸 차에 태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개울가며 들판에 풀어놓고 자식과 며느리는 늙은 아버지 어머니와 툇마루에 앉아 막걸리 한 잔씩 마셔보는 것이…. 그러면 그림자보다 더 가벼운 저 몸에 따스한 샘물 고여 막걸리를 좀 덜 잡수시지 않을까.

정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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