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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당단부단(當斷不斷) 반수기란(反受其亂)’

입력
2017.11.06 15:5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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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자유한국당 홍준표대표가 박근혜 전대통령과 친박세력 일부를 당에서 내쫓기 위한 단호함을 표현하고자 ‘당단부단(當斷不斷) 반수기란(反受其亂)’이라는 중국의 오랜 속담을 인용했다. 실은 홍 대표는 이미 2011년에도 한미 FTA 국회 비준을 앞두고서도 같은 말을 사용한 바 있다. 본인으로서는 뭔가 결단의 순간을 잘 표현해 주는 말로 여기는 듯하다.

정치인들이 고전에서 명구(名句)를 인용하는 것은 잘하면 각박한 권력싸움에 한 줌 여유의 숨통을 터줄 수도 있고 윤활유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 인용한 이 ‘당단부단반수기란’은 권력을 행사하는 쪽이 써서는 안 되는 말이어서, 듣는 순간 섬뜩했다.

풀이하면 ‘마땅히 잘라내야 하는데 잘라내지 못했다가 도리어 그 난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실행을 앞둔 ‘결단의 언어’가 아니라 ‘후회의 언어’임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이 나왔다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마찬가지다. 춘신군이라는 초나라의 재상이 이원이라는 인물을 잘라 내라는 어떤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가 이원에 의해 자신도 죽고 집안도 파멸을 당하자 사마천이 평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잘라내야 하는데 잘라내지 못했다가 도리어 그 난을 당하게 된다는 속담대로 된 것인가”라고 했다.

이 말은 반고의 ‘한서(漢書)’에도 등장한다. 그걸 보면 널리 쓰이던 속담이었던 것 같다. 한나라 때 번영을 이끈 무제(武帝)가 죽고 소제(昭帝)가 뒤를 이었는데 후사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이 무제의 손자 창읍왕 유하(劉賀)를 불러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즉위한 새 황제가 상중인데도 날마다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사냥과 유희를 즐기는 등 음란과 패악을 일삼자 대장군 곽광(霍光) 등이 27일 만에 그를 내쫓고 새롭게 선제(宣帝)를 세웠다. 그리고 곽광은 유하를 잘못 보필한 책임을 물어 창읍국의 신하 100여명을 주살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원통함에 소리치며 했던 말이 “마땅히 잘라내야 하는데 잘라내지 못했다가 도리어 그 난을 당하게 된다더니 우리가 그 꼴이구나!”였다. 곽광을 죽이지 못한 데 대한 후회였다.

그러니 이 말은 사후(事後)의 언어일지언정 사전(事前)의 언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사실상 ‘너 죽고 나 살자’는 독단(獨斷)과 이기(利己)의 표현일 뿐 문제를 해결하자는 말은 될 수 없다. 물론 이 말이 남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비판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나름의 긍정적 기능이 있을 수 있다. 2015년에 이재오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향해 문고리 3인방을 잘라낼 것을 요구하며 이 말을 썼던 적이 있다. 그런 경우라면 미래를 향한 경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굳이 지금의 우리 상황에서 이 말이 본래적 후회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경우라면 힘 빠진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친박 핵심들이 혼자 넋두리처럼 썼을 때가 아닐는지?

그런데 홍준표대표가 인용한 이 문구는 이미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말로는 적폐를 만들어 낸 시스템 청산이라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올 한 해 새로운 정부가 보여준 적폐청산은 점점 ‘마땅히 잘라내야 하는데 잘라내지 못했다가 도리어 그 난을 당하게 된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많은 국민이 여야 할 것 없이 현재 우리 정치 혹은 정치지도자의 수준을 낮게 보고 특히 앞으로 더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도 어쩌면 그들의 이런 마음가짐 때문이 아닐까? 제자 자공(子貢)이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 한 말이나 한 말 두 되 들이의 자잘한 사람들을 어찌 따질 수나 있겠는가?"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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