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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괴물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사랑은

입력
2016.10.3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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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몬스터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소꿉친구이자 몬스터를 퇴치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전사. 그녀는 그가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이 되어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는 운명의 계시를 받고 길을 떠난다. 그녀도 고향을 떠난다. 따라오지 말라는 그에게 억지를 부리고, 앞질러가 길목을 지키면서 영웅의 여정에 합류한다. 능력도 소명도 없는 그녀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지만, 온 힘을 다해 죽을 것 같은 위험과 공포 속을 헤쳐 나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시련은 끝이 없고 도전은 험난하다. 그녀를 버티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 사랑하는 그의 발목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다. 언젠가는 부딪혀 부서질 것이고, 언젠가는 주저앉아 포기하게 될 것임을 알지만, 그녀는 매 순간 마지막으로 내지르는 비명 같은 의지로 운명과 싸운다. 사랑에 빠진 이 미약한 소녀는 사악한 존재와 맞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인 ‘에스트폴리스 전기 2’라는 롤플레잉게임 속 캐릭터다. 나는 이 게임을 해본 적이 없지만 게임에 대한 에세이(박상우, ‘게임이 말을 걸어올 때’, 루비박스)를 읽다가, 조연에 불과한 이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세상 풍속에 따라 속절없이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게임 속이 아니라면 그녀는 그토록 절박하고 가망 없는 사랑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곳에서 사랑은 액세서리나 구두나 모피코트 같은 것이니까. 헬스클럽에서 백화점에서 카페와 식당과 편의점에서 TV와 영화와 잡지 속에서 주어진 선택지를 향해 손을 뻗으면 되니까. 아니다. 설마 사랑이 그 정도밖에 안 될까. 적어도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집은 되겠지. 사는 집이 당신을 말해주듯 어떤 사랑을 하느냐가 당신을 말해주는 건데. 점검하고 확인해야 할 사전계약서와 품질보증서만 해도 꽤나 복잡한데. 예쁜 사랑 품격 있는 사랑으로 이후로도 행복하게 살아야만 하는데.

그러나 사랑이란 한순간 괴물로 변하는 것이지 않던가. 사랑이라는 단어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대명사일지도 모른다. 이기심, 차별, 억압, 소유욕, 인정욕구, 억제되지 않는 충동 그리고 지하철역 입구에서 내밀어지는 전단지 같은 호의, 바닥에 떨어져 밟힐 때마다 지뢰가 되는 그것에도 쉽사리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어버린다. 사랑이라면 이래야 한다, 사랑이라면 저래야 한다, 사랑한다면서 이것도 못 해주냐, 사랑한다면서 저것도 못 해주냐, 소리 높여 요구하고 외친다. 게임 속 그녀처럼 몸을 던져 싸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괴물은 우리에게 괴물로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의문이 떠오른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는 진짜 영웅이었을까. 그에게 세상을 구하라는 소명을 부여한 것은 그녀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영웅과 괴물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건 아니었을까. 지옥의 불길 같은 단계들을 통과하면서 그녀가 바라본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웅과 괴물이 창궐하는 세상, 점점 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용기 있는 사랑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데.

그녀가 사랑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천생연분, 계시를 받은 아름답고 강인한 여전사를 만난다. 한 쌍의 영웅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동안 그녀는 원망도 눈물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소소한 일상을 이어간다. 그리고 운명의 두 영웅이 사악한 존재를 마지막으로 처치하면서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멀리 떨어진 고향에서 그녀는 까닭 모를 슬픔을 느낀다.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투명하다. 영웅들은 세상을 구해냈으며 그녀는 홀로 자신의 사랑을 구원했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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