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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 통영서 100번째 생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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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 통영서 100번째 생신연

입력
2017.01.1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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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생존 피해자 가운데 두 번째 고령자인 김복득 할머니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100세 생신축하 촛불을 끄고 있다. 뉴시스
위안부 생존 피해자 가운데 두 번째 고령자인 김복득 할머니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100세 생신축하 촛불을 끄고 있다. 뉴시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지난 14일 오후 경남 통영시 도산면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 강당에서 100번째 생신 상을 받았다.

김복득 할머니는 음력 1918년 12월 17일생.이날은 한국 나이로 딱 100세가 되는 날이다.

김 할머니는 일본군'위안부' 생존 피해자 가운데 두 번째 고령자다.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상임대표 송도자)은 시흥평화의소녀상건립추진위원회와 함께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 강당에서 생산 상을 차렸다.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은 할머니가 5년째 노환으로 입원 치료중인 곳이다.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를 받지 못한 채 맞이하는 100세 생일, 최근 부산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을 놓고 한일간 갈등이 고조된 터라 어느 때 보다 관심이 집중됐다.행사 시작 30분 전부터 강당 안은 축하객들로 붐볐다. 

지역민과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어진 오후 2시 10분께. 생신 축하연 자리에 짙은 보라색 벙거지 모자에 하얀 마스크를 쓴 할머니가 병원 이동식 침대에 누워 행사장을 찾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로 옮겨졌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휠체어에 앉아 단상에 오른 할머니는 생각지 못한 인파에 잠시 놀란 듯하더니 살짝 미소 지었다.  

강당 불이 꺼지고 할머니가 걸어온 길을 담은 영상이 시작됐다.경상남도교육청이 제작한 영상의 제목은 ‘나를 잊지 마세요’.이미 수 십, 수백 번은 봤을 영상이지만 할머니는 자신의 육성이 들리자 또다시 눈물을 훔쳤다.

10분 남짓의 짧은 영상이 끝나고 조카가 건넨 헌주를 반갑게 받아든 할머니가 살포시 입술을 적셨다. 가족들이 나와 큰절을 올리자 할머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례했다. "생신 축하 합니다.”

숫자 ‘100’을 본딴 초에 불이 켜지고,함께한 모든 이들은 한마음으로 부른 축가에 할머니는 또 한 번 눈시울을 붉혔다. 

뒤이어 충무초등학교 권요한 군의 축시, 위안부 문제에 침묵하는 우리 정부와 적반하장인 일본의 행태를 꼬집는 일성에 이어 “건강히 오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할머니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지금처럼 건강하게 오래사세요”라고 말했다.

송도자 시민모임 상임대표는 “할머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성 인권과 평화의 거울이 된다”며 “과거로 회귀를 시도하는 일본 극우세력들은 눈과 귀가 있고 양심이 있다면 김 할머니를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김복득 할머니는 스물 둘이 되던 1939년,고향 통영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동네 그물공장에서 일할 때 만난 한 일본인이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기에 덜렁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다.삼남매 중 맏이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던 터라 큰돈 벌 수 있다는 말에 따라 나선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발을 디딘 곳은 공장이 아닌 전쟁터였다.중일전쟁 당시,군사 요충지였던 중국 다롄에 도착한 그는 ‘후미꼬’라 불리며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3년 만에 다시 필리핀 위안소로 끌려갔고 지옥같은 생활은 4년여 넘게 계속됐다.무려 7년여,모진 세월을 버텨낸 그는 1945년 해방 무렵에야 귀향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텃밭을 가꾸며 채소 등을 팔아 평생을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내놨다.지역 학교 장학금과 위안부 역사관 건립기금 등으로 수천만 원을 기탁했다. 

일본을 향한 외침도 멈추지 않았다.할머니는 되내기조차 거북한 토막 난 기억을 헤집으며 공식 자리에서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다. 1994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한 할머니는 2003년 8월 광복절,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를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거동은커녕 진통제 없인 통증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지만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나는 돈도 필요 없다.일본이 참말로 사죄만 한다쿠모 나는 편히 눈을 감고 갈 수 있겠다.나비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겄다”.

100세 축하연에 함께한 이들이 뒤늦게 답했다. “할머니. 사과 받기 전까진 절대 눈 감으면 안됩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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