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망각 없이는 기억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알림

망각 없이는 기억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입력
2015.10.16 20:00
0 0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발행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발행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아내를 잃고 5년간 절필한다. 5년 만에 발표한 에세이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 그는 잊지 않고자 애를 쓰는데도 아내에 대한 기억이 점차 사라져 어떤 부분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음을 고통스럽게 기술한다. 그는 자신의 기억이 타버린 것 같다고 느끼고, 사별한 아내를 과거의 기억 속에서 또 한 번 잃는다는 사실에 직면해 한없는 슬픔을 느낀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잊어버리는 것일까?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망각’은 바로 이 문제, 기억의 이면인 망각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한다.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먼 과거 즉 ‘최초의 기억’은 무엇이며 그 이전은 잊어버린 것일까? 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억하지 못할까? 기억 능력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태어나 뇌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는 아무런 기억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생아의 뇌 무게는 약 350g으로 성인의 뇌 1,200~1,400g에 현저히 못 미치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뇌 측두엽의 해마는 첫 해에 완전히 성장하지 않는다. 뇌가 충분히 성장한 후에도 기억과 망각의 역할은 혼돈스러울 정도다. 잊고 싶은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은 잊어버리며 제멋대로인 기억과 망각의 장난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내맡기고 살아야만 한다.

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화적 기억(episodic memory)과 의미적 기억(semantic memory)을 구분해야 한다. 일화적 기억은 명확한 공간적?시간적 맥락 속에 위치한 사건에 관한 기억이다. 반면 의미적 기억은 흔히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낱말, 개념, 세계에 대한 지식, 코드화의 온갖 맥락 밖에 위치한 사실에 관한 기억이다. 일화적 기억과 의미적 기억은 모두 뇌의 작용이지만 둘은 각기 다르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의미적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화적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거나 그 역의 경우가 병리학적 사례에 종종 등장하기 때문이다.

장기기억과 단기기억의 차이는 환자 H.M.으로 알려진 헨리 몰레이슨의 사례로 분명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는 1957년 간질을 치료하기 위한 뇌 절제술을 받고 편도체의 4분의 3과 해마를 잃었다. 그 후 지능에는 이상이 없는데도 기억이 30초밖에 가지 않는 장애를 겪었다. H.M. 사례 연구를 통해 해마가 새로운 기억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후두엽에 장애가 생기면 얼굴을 인식하기 어렵다. 얼굴인식불능증이라는 증상도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자주 생기는 코르사코프 증후군도 망각과 관련된 질병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병리학적 연구 사례만 아니라 심리학사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밝혀야 할 것이 밝힌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기억은 긍정적인, 망각은 그 반대인 부정적인 메타포를 통해 표현한다. 기억은 저장이고, 보관이며, 창고나 도서관의 이미지이지만 망각은 암흑이고, 삭제이며, 사라짐인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우리의 익숙한 생각에 도전한다. 망각은 기억이라는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 있는 효모와 같아서 망각이 없이는 기억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책 읽는 보통 사람들’ 운영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