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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누가 사용자인가

입력
2018.02.25 19:0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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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용자인가’란 물음은 노동법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이다. 누군가의 사용자가 된다는 건 임금 지급과 같은 계약 책임과 함께 노동법, 사회보험 등과 같은 법률적 책임을 부담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용자’라는 지위가 인정될 때, 타인의 노동을 사용하여 사업을 운영하는 자연인(自然人)과 법인(法人)은 국가의 규범 체계에 포섭된다. 이 규범 체계는 의회 제도의 산출물이므로, 결국 사용자 개념은 ‘기업’이라는 시장(市場) 속의 존재가 민주주의로 편입되는 입구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법은 근로자가 개인 기업 또는 법인격을 갖춘 하나의 기업에 소속되어 노동을 제공한다는 전제 아래 보호 법제를 마련했다. 기업은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조직이고, 그 곳에서 개별 근로자의 노동은 분업을 통해 공동의 목적에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자본 단위에 의해 통제되고 지휘되는 생산 관계라는 점에 착안해서 법적 권리 및 책임 주체로 파악된다. 즉, 노동법에서 ‘사용자’란 타인의 노동을 사용하는 개인 또는 단일한 자본 단위로 파악되는 법인이다(예컨대 동네 편의점은 개인 기업, 전자제품을 만드는 주식회사는 법인 기업이다). 법은 이들을 ‘사용자’라 부르고 권리와 책임을 부여한다. 책임을 부과할 때에는 ‘이익이 있는 곳에 책임이 있다’는 원칙이 적용된다. 타인의 노동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익을 얻는 자와 책임 주체가 불일치하면, 앞에서 언급한 민주적 질서는 노동시장에서 불완전하게 작동되기 때문이다.

GM 사태는 위 원칙이 실현되지 못할 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느 언론의 비유처럼 GM은 마치 빨대를 꽂은 듯 막대한 이자와 업무지원비, 기술 라이선스 등만 빼내 한국GM을 적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군산 공장 폐쇄라는 카드를 꺼내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행 법제도는 우리 근로자의 노동을 통해 이익을 얻은 GM 본사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못한다. 그 효력이 국경에서 멈추는 이상, 설령 군산 공장이 폐쇄되어 수천 명이 구조조정되더라도, 한국법이 GM 본사에게 책임을 묻는 건 불가능하다. 이익은 얻고 책임은 면하는 최적의 조건에서 GM은 정부와 흥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공정한 일이 벌어지는 건 생산 조직의 결합이 앞에서 언급한 방식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은 하나의 법인격에 의해 결합되는 방식 외에도 오너십, 계약, 권위 등으로써 결속된다. 즉 지주회사ㆍ재벌과 같은 모습을 통해 여러 회사가 단일한 오너십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 하청 시스템과 기업 간 계약을 통해 생산 조직이 결합되는 경우, 그리고 투자회사와 기업 간의 관계에서 개별 기업의 의사 결정이 투자회사에 종속되는 등의 방식이 이용되곤 한다. 기업은 비교적 자유로운 법률적 여건 아래에서 위 방식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을 통해, 때때로 국경을 넘어 생산 조직의 경계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뜻에 따라 노동법 등 법률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GM 사태를 보며 우리는 ‘누가 군산 공장 근로자의 사용자인지’를 고민한다. 그런데 눈을 돌려보면, 우리나라의 하청 시스템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청업체 근로자의 노동을 통해 얻는 이익은 불공정한 거래 조건에 의해 대기업으로 흘러가고, 하청업체 근로자의 일자리는 그 법인격 밖에 있는 대기업의 의사에 좌우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지금 GM의 근로자와 일반적인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상황은 같다. 조금 엉뚱한 생각일 수 있지만, 외국 기업에 의해 벌어진 이번 일이 우리 법제도의 흠결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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