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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빨강머리 앤 좋아하던 ‘자본주의 청년’ 김정남

입력
2017.02.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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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3대 세습을 추종하는 일은 없다.”

2011년 1월, 일본 도쿄신문 편집위원 고미 요지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은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발언을 한다. 자신은 3대 세습을 반대하며, 이는 사회주의와도 맞지 않다는 것.

그는 심지어 “아버지(김정일)는 세습에 반대했지만 국가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맏아들이자, 김일성 국가주석의 맏손자인 백두혈통의 핵심인걸 고려하면 매우 파격적인 발언이다.

김정남은 같은 인터뷰에서 “북이 안정되고 경제회복을 달성하기를 바란다”며 자신의 생각이 고국을 위하는 순수한 바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미 권력다툼에서 밀린 뒤에 한 인터뷰라는 점에서 그가 시기심에 이 같은 말을 했을 가능성도 높다. 김정남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김정남이 2010년 마카오 시내 한 호텔에서 취재진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정남이 2010년 마카오 시내 한 호텔에서 취재진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빨강머리앤을 좋아했던 인터넷 키드

1971년 5월 10일,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태어났다. 그의 생모인 배우 성혜림은 유부녀였기 때문에 김정일은 아버지에게 불륜관계를 들킬까 전전긍긍 했지만, 백두혈통 첫 아들에 대한 집안의 애정은 각별했다. 2012년 일본 산케이신문이 북한 내부 정보원을 통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생전에 김정은을 정식 손자로 인정하지 않고 장남인 김정남을 후계자 감으로 봤다고 한다.

덕분에 김정남은 북한 내부는 물론 집안의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도 풍부한 문화적 혜택을 누렸다. 한국에 귀순했던 김정남의 사촌 이한영의 증언에 따르면, 소년 김정남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는 ‘빨강머리 앤’이었을 정도로 외서나 한국 동화책을 자주 읽었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도 모두 섭렵했다. 김정남은 9살 때 코미디언 이주일에 푹 빠져 ‘이주일을 데려와서 내 앞에서 공연하라’는 지시까지 했다. 당시 관리들은 북한에서 이주일을 닮은 희극배우를 데려와 한 달간 연습을 시키고 김정남 앞에 세웠지만, 그는 바로 가짜임을 알아보고 ‘연극 꾸미느라 수고 많았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자녀들이 밟은 해외유학 코스 역시 김정남이 가장 먼저였다. 그는 13세이던 1983년도에 김주하라는 가명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의 프랑스어 특수학교를 다녔는데, 동급생들은 그를 디스코텍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멋지게 추는 친구로 기억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남은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학교와 제네바 대학교를 거쳤고,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ㆍ러시아어까지 능통한 코스모폴리탄이 됐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도 새로운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987년 원산 해수욕장에서 김정남이 수상스키를 타고 있다. 뉴스1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도 새로운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987년 원산 해수욕장에서 김정남이 수상스키를 타고 있다. 뉴스1

20대가 된 김정남은 이후 후계자 수업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이후 김정남이 북한 인민군 소속 비밀경찰부대인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요직을 맡았고, 당시 북한 내부에선 김정일과 김정남을 각각 ‘장군’과 ‘작은장군’으로 불렀다는 증언이 나온다. 2001년 1월에는 김정남이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아들 장미엔항 사회과학원 부원장과 회동했다는 것도 확인됐다.

주목할 점은 그가 1999년 북한의 정보통신산업을 총괄하는 조선컴퓨터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가 IT분야에 관심이 많았다는 증언은 곳곳에서 나온다. 2000년 방북해 김정남을 만난 국내 한 벤처기업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컴퓨터 및 벤처산업에 상당한 지식을 가졌고, 향후 북한 내 첨단산업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비슷한 시기 통일부 관계자 역시 “김정남이 일본 조총련으로부터 입수한 최신게임기와 소프트웨어를 밤새 작동해보는 등 컴퓨터 광이라는 정보를 접했다”고 말했다. 북한 최초의 인터넷이 그의 집에 설치됐던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처럼 후계자 물망에 오르던 시절의 김정남은 2002년 평양-남포지역 이동전화 개통을 위한 남측과의 협상을 사실상 주도하고, 중국의 실리콘밸리인 ‘중관춘(中關村)'을 수시로 드나드는 등 북한경제에 신산업을 도입하려는 행보를 보였다.

아버지와 멀어진 ‘자본주의 청년’

비슷한 시기 김정남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2001년 5월 도미니카 국적의 위조여권을 이용해 일본에 밀입국하다 발각된 것이다. 김정남은 당시 부인 및 아들로 보이는 어린이 1명과 함께 입국했고 도쿄 디즈니랜드를 가기 위해 왔다고 진술했다. 신분을 노출시켜선 안 되는 그가 가족들까지 데리고 밀입국을 하다 발각돼 중국으로 추방까지 된 것은 북한 정부로선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가 후계경쟁에서 밀려났다고 본다.

하지만 김정남이 권좌와 멀어지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훨씬 전인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오랜 유학기간에 걸쳐 자본주의 청년으로 변하자 아버지는 이복동생들에게는 유학기간을 짧게 하고 현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도록 통제를 엄격하게 했다”고 말한다. “내가 (유학을) 떠난 후에 아버지의 애정이 정은ㆍ정철에게 간 것 같다”며 제네바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한다.

김정남(왼쪽)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 이복형제인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적이 거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합뉴스
김정남(왼쪽)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 이복형제인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적이 거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합뉴스

김정일은 장남을 해외로 보내 일종의 ‘지도자 수업’을 했지만, 김정남이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한 개방적인 인물이 되어 돌아오자 북한식 사회주의체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우려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정남은 스위스 유학을 마친 뒤 아버지에게 경제개방 및 개혁을 주장했고 이는 김정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그가 김정은의 권력 승계 이후 외자유치 정책에 대해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지만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신뢰를 쌓지 않으면 실현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라고 평가한 것도 북한의 정서와 그의 계획이 상당히 동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김정일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셋째 아들 김정은을 선택했다.

‘응징명령을 취소해주길 바랍니다’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면서 김정남의 삶은 위태로워졌다. 3대 세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두 명의 백두혈통이 공존해선 안 됐다. 특히 장자인 김정남이 북한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언젠가 생모가 제일교포인 김정은의 정통성에 위협이 올 수 있었다.

김정일이 셋째 아들 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했다고 교시를 내린 건 2009년이었지만, 후계다툼으로 인한 위험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4년 11월 중순 김정남은 오스트리아에 방문했다가 암살될 위기에 놓였지만 오스트리아 정보기관의 경호로 이를 모면했다고 한다. 당시 정보기관은 김정은ㆍ정철의 측근인 반 김정남 세력으로 파악한다.

2009년 이후 김정남에 대한 위협은 더 잦아진다. 2009년 4월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우암각이라는 평양의 별장을 습격해 김정남의 측근들을 구속한다. 우암각은 해외에 거주하던 김정남이 북한으로 들어올 때마다 들러 비밀 정치 회동을 하던 장소다. 국가보위부는 김정남의 측근 30여명이 김정남 귀국을 대비해 회의를 시작했다는 걸 알고 현장을 덮쳐 숙청을 감행한 것이다. 정보를 미리 안 김정남은 싱가포르로 대피해 한동안 북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양 손이 포승줄에 묶인 장성택이 국가안전보위부원들에게 잡힌 채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3년 북한은 특별군사재판을 열어 ‘국가전복음모의 극악한 범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형을 집행했다. 연합뉴스
양 손이 포승줄에 묶인 장성택이 국가안전보위부원들에게 잡힌 채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3년 북한은 특별군사재판을 열어 ‘국가전복음모의 극악한 범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형을 집행했다. 연합뉴스

김정남에 대한 위협이 극에 달한 건 2013년 고모부 장성택의 숙청이다. 김정남은 어린 시절부터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그의 남편인 장성택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왔다.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장성택을 통해 생활비를 전달받았다고 한다. 때문에 장성택 처형 당시에는 그의 측근과 김정남이 너무 자주 접촉한 것이 숙청의 원인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 외에도 김정남과 그의 가족을 옥죄어온 위협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2012년 4월 그가 김정은에게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응징명령을 취소해주기 바랍니다. 저희는 갈 곳도 피할 곳도 없습니다”라며 편지를 보낸 건 그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 김정남이 언론인터뷰에서 자신의 동생을 지칭해 “2년 동안 교육한 젊은 후계자가 37년간의 절대권력을 이어갈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하거나 북조선이 아닌 ‘북한’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려 위험이 고조됐다는 분석이다.

파국을 예상했던 걸까. 공교롭게도 김정일은 2011년 12월 사망하면서 “김정남을 많이 배려해라, 그 애는 나쁜 애가 아니다. 그 애로를 덜어줘야 한다”고 유훈을 남겼다.

‘특권층 배경은 모두 잊어라’

김정남의 장남 김한솔이 핀란드 공영방송 YLE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 캡쳐
김정남의 장남 김한솔이 핀란드 공영방송 YLE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 캡쳐

2012년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은 핀란드 공영방송 YLE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특권층이라는) 배경은 모두 잊어라. 굶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네가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해라’라는 말을 자주하셨다.”

권력승계에서 밀려난 뒤 마카오에 거주하며 조용히 지내던 김정남으로선 아들의 안전을 위해선 ‘김정일의 손자’가 아닌 평범한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경을 잊으라’는 말 뒤에 붙은 조언은 의미심장하다. ‘굶주리는 사람들’은 조국의 인민을 가리킨 것일까. 2010년 동생 김정은을 향해 “민간에게 포격을 가해 악명 높은 지도자로 묘사되지 않고 덕망 높은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을까.

죽은 자는 말할 수 없다. “대학 졸업 후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여하고 싶다”며 해맑게 웃던 그의 아들도 마카오 어딘가에서 가족들과 함께 은신 중이다. 김정남이 김정은의 ‘스탠딩 오더’로 인해 목숨을 잃었든, 다른 이유로 사망했든지 간에 김씨 일가의 형제사는 비극이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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