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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5490번… 그는 왜 악성민원인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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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5490번… 그는 왜 악성민원인이 됐나

입력
2017.03.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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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대로 안되면 민원폭탄 보복 일쑤

1명이 구청 접수 건수 3분의 1 차지

도와준 권익위 직원들까지 고소도

생계ㆍ절박함에… 폭행ㆍ방화까지

#2

5회 이상 제기한 고충민원 3만건

이중 90%가 미해결… 갈등 뇌관

공무원들 냉가슴, 행정력 낭비 심각

민원인 홍모씨가 14일 자신의 집에서 지금까지 검찰, 경찰,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보낸 100여통의 진정서 사본과 각 기관들로부터 회신 받은 봉투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홍씨는 자신이 사기 당한 사건을 재조사하고 수사를 그냥 종결한 검사 22명을 처벌해 달라며 12년째 민원을 반복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민원인 홍모씨가 14일 자신의 집에서 지금까지 검찰, 경찰,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보낸 100여통의 진정서 사본과 각 기관들로부터 회신 받은 봉투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홍씨는 자신이 사기 당한 사건을 재조사하고 수사를 그냥 종결한 검사 22명을 처벌해 달라며 12년째 민원을 반복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140번째다. 홍모(66)씨는 오늘도 청와대ㆍ국회ㆍ검찰ㆍ경찰에 자신이 사기당한 사건을 조사하다 사법처리 없이 종결한 검사 22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수사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이번에도 각하다. 그는 횟집 주방장이었다. 2005년 큰 돈을 벌어보려고 이발소를 인수했다가 전 재산을 잃었다. 홍씨 입장에선 사기였지만 애초에 이발소는 불법 퇴폐업소였고 사기사건으로 처리할 증거가 없었다. 수사가 종결됐으나 홍씨는 민원을 멈추지 않았다. 민원을 넣으면 잠시 조사가 진행되다 마는 일이 반복되면서 홍씨의 좌절은 커졌고, 그럴수록 그는 더 강도 높게 민원을 제기하는 일을 12년간 반복해 왔다. 그는 정부가 관리하는 ‘특별민원인’이다.

지속되는 항의와 좌절은 범죄로 번질 판이다. 홍씨는 2010년부터 4차례나 청와대 연풍문 앞에 불을 지르려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지난달 16일에도 3일 동안 구치소 신세를 졌다. 경찰이 또 민원을 각하하자 화가 나서 경찰민원상담센터(182)에 전화해 “지하철에 불이라도 질러야 수사를 할 거냐”고 말한 게 문제였다. 홍씨는 14일 기자에게 “내가 정말 불을 지르겠나. 이렇게라도 안 하면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내 속에서 불이 나서 하는 말”이라고 토로했다. “가슴에 억울한 응어리가 맺혔다.”

검ㆍ경찰의 입장에서는 난처할 뿐이다. 홍씨 사건을 조사했던 수원지검 관계자는 “홍씨가 자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담당 검사가 일과 후 2시간 동안 홍씨와 개인 면담을 하기도 했다. 도와주고 싶지만 이미 법적으로 결론이 난 사안이라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억울함 호소하는 민원인… 2만5,000번이나

민원인은 억울한데, 정부는 해 줄 것이 없다. 평행선처럼 만나지 못하고 나란히 달릴 뿐이다. 2015년 정부민원포털 민원24에 접수된 민원은 총 6,519만건. 같은 민원을 5차례 이상 반복하거나 폭력행위를 동반한 소위 ‘고충민원’은 3만1,308건(반복 민원은 1건으로 집계)이다. 이 중 해결된 것이 3,195건이고, 나머지 90%는 지금도 정부 부처 여기저기를 떠돌며 갈등을 키우고 세금을 낭비한다.

이미 조사가 끝났고 해법이 없는데도 민원을 무한반복하는 것은 고충민원의 전형적 유형이다. 김모(53)씨는 군 복무 중 차량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뒤 간질 증상이 나타나자 국가유공자 등록을 요구했다. 하지만 간질이 사고 때문이라는 의학적 근거가 없어 거부됐다. 그러자 김씨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에 하루 최대 180여건, 10년 간 2만5,490건의 민원폭탄을 쏟아 부었다. 민원 한 건 회신에 10분이 걸리는 것으로 계산하면 총 4,248시간, 공무원 한 사람이 177일 동안 이 일에 매달렸다는 뜻이다.

2013년 서울 광진경찰서는 715건의 허위 민원을 제기한 혐의(공무집행방해)로 강모(34)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그 해 강씨는 아무 주소나 기입해 ‘불법 주차 차량이 있다’는 허위민원을 포함, 총 2,901건의 민원을 제기했다. 광진구 전체 민원(8,487건)의 34%다. 하루에 115건을 접수한 날도 있다. 더욱이 강씨는 민원처리 결과를 통보받기 전에 구청에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 일일이 처리결과를 확인해 ‘구청의 공포’로 불렸다.

민원인 일부는 폭행ㆍ협박ㆍ방화 등 폭력행위를 동반한 막무가내형으로 진화한다. 그 와중에 민원인을 상대하던 공무원들이 덫에 걸린다. 신모(73)씨는 자신이 가입한 의료실비보험 보험료가 어느 날 월 1,000원씩 더 빠져나간 것을 발견하고 금융감독원에 지금까지 납부한 보험료 전액을 돌려받게 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금감원이 보험사에 보험료 인상내역을 안내하도록 하고 민원을 종결하자 이번에는 금융위원회와 청와대에 금감원 담당자를 처벌해 달라는 민원을 넣었다. 민원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씨는 해당 공무원들을 고소했다. 현재까지 행정심판 67건, 소송 37건을 제기한 신씨가 고소한 공무원은 300명이 넘는다. 신씨를 도와 준 권익위의 위원장부터 고충처리국장, 조사관들이 모두 고소대상에 포함됐다. 지금도 신씨는 계속 새로운 민원과 고소를 추가하는 중이다.

방치하면 사회적 갈등 비용 커져

공무원으로서는 해결해 줄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무한반복 민원에 응대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국가 행정력의 낭비도 심각하다. 정부와 지자체, 검찰, 법원, 청와대 등을 거쳐 온 고충민원이 최종적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은 권익위 고충처리국(143명)이다. 연간 3만여건의 고충민원 중에서도 상습적인 폭력행위가 있고 공무원을 상대로 고소ㆍ고발 협박을 하는 경우는 고충처리국 내 고충민원특별팀이 떠안는다. 가장 힘들고 위험하기까지 한 이 악성 민원들을 권익위는 ‘특별민원’이라고 부른다. 연간 25건 정도다. 특별민원 한 건을 실제로 해결하기까지 거쳐간 권익위 인력은 최대 30명, 평균 4.8명이다. 소요 기간은 평균 6.4년, 최장 22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제도적 해법이 없거나 해결과정이 어렵다고 방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민원이 합당하게 처리되지 않으면 더 많은 민원을 양산하거나 간혹 범죄로 이어져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등 사회적으로 감당해야 할 갈등 비용이 커지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전모(39)씨는 관악경찰서를 찾아 경찰에게 황산을 뿌렸다. 2012년 전씨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계속 연락해 불안하다’고 신고했으나 증거가 없어 수사가 진행되지 않자 이후 4년간 민원 담당 박모(44) 경사에게 매일 전화하고 문자를 보냈다. 급기야 전씨는 보온병에 담아온 황산을 박 경사의 얼굴에 뿌려 2도 화상을 입혔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민원인의 성향 문제라는 시각이 많지만 민원인 입장에서 원인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계가 걸린 절박함 때문에 오로지 민원에만 매달리는 이들이 있다. 97년 서울 성북구 3층 빌라를 매입했다가 통째로 잃고 노후자금을 날리게 된 이모(78)씨가 그렇다. 구청의 도로설치 계획에 빌라 일부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집을 산 이씨는 빌라 전체를 1m 후퇴시키는 공사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입주민들에게 전세보증금을 되돌려 주고 내보내야 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결국 이씨는 2001년 성북구에 빌라를 팔고 1억7,000만원을 보상받았지만 보증금을 내주고 되려 빚만 남았다. 그는 16년째 빌라를 원상복구 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오모(75)씨는 평생 문구점을 해서 모은 2억6,000만원을 기숙사를 짓는 사업에 투자했다가 업체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투자금 전액을 날렸다. 하지만 오씨는 지자체가 인허가를 안 내 줘 사업이 고꾸라졌다고 믿고 있다. 파산하고 민원도 수용되지 않자 오씨는 지자체 책임을 묻는 자신을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며 2000년 ‘내 말이 진실이 아니면 참수하라’고 대통령 앞으로 도끼날을 보내는가 하면, ‘월북하겠다’고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통령 비서실로 보냈다가 경찰 조사를 받았다. 5,600여건의 민원을 제기한 오씨는 그러나 권익위의 도움으로 공동모금 등을 통해 생계가 해결되면서 민원을 뚝 그쳤다.

국민권익위원회 고충처리국 고충민원특별팀이 현재 처리 중인 민원 서류철. 한 명의 민원이 서류철 1~3개로 정리돼 있다. 세종=박재현 기자
국민권익위원회 고충처리국 고충민원특별팀이 현재 처리 중인 민원 서류철. 한 명의 민원이 서류철 1~3개로 정리돼 있다. 세종=박재현 기자

무관심과 냉대가 악성 민원 만들기도

처음 민원을 제기했을 때 경험한 냉대가 일을 키우는 일도 흔하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간 민원 담당자들로부터 무관심과 귀찮다는 반응을 겪고 “이 세상 누구도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없다”는 고립감에 빠지는 순간, 민원은 폭력을 수반하고 그 때문에 외면당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권익위는 특별민원의 20%가 공무원과 민원인의 대화 단절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 김의환 권익위 고충처리국장은 “특별민원인 중에는 단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이들도 있다”며 “공무원이 업무가 많다는 이유로 그들을 홀대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10년이나 지속됐던 심모(65)씨의 민원은 담당 공무원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 봤다면 진작 해결될 일이었다. 강원 인제군에서 운전면허학원을 운영하던 심씨는 학원 출입로에 대한 점용료를 내는 것이 부당하다고 호소했지만 여기에 귀기울인 이들은 없었다. 민원을 넘겨받은 권익위 직원들이 직접 구청과 국토교통부를 뛰어다니며 확인한 결과 심씨의 억울함이 드러났고, 10년 묵은 민원이 말끔히 해결됐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행정절차의 투명성을 강조한다. “간혹 비슷한 민원에 대해 어떤 사람은 해결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민원인들은 정상절차를 거쳐서 나온 결과도 못 믿는 경향이 생긴다. 어떤 절차가 있고, 어떤 이유 때문에 민원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지를 일반 국민의 시각에서 쉽게 설명해야 한다.”

떼를 쓴다고 모두 들어줄 수는 없다. 다만 민원이 악성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국 중 2위(2010년 기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갈등으로 발생하는 경제비용을 최소 82조원에서 최대 246조원으로 추산한다. 고질ㆍ악성이라 불리며 냉대를 당하는 특별민원인, 그들로부터 폭행ㆍ협박 등을 당하며 냉가슴을 앓는 공무원들 사이의 거리는 아직 좁혀지지 않고 있다.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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