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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를 따라… 다들 꿈꾸지만 지도에 없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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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를 따라… 다들 꿈꾸지만 지도에 없는 그곳으로

입력
2015.10.09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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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도라도·툴레·세바 여왕의 나라… 고대신화부터 SF소설 속 장소까지

전설이 어떻게 믿음이 되는지 설명

300여개 원색 도판 보는 즐거움도

사라진 대륙의 전설 중 하나인 뮤 대륙에 관한 기록으로 오인된 마야 문서. 뮤 대륙은 1만 3,000년 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고 전해진다. 마드리드 사본(트로코르테시아누스 Ⅱ). 마드리드, 아메리카박물관. 열린책들 제공
사라진 대륙의 전설 중 하나인 뮤 대륙에 관한 기록으로 오인된 마야 문서. 뮤 대륙은 1만 3,000년 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고 전해진다. 마드리드 사본(트로코르테시아누스 Ⅱ). 마드리드, 아메리카박물관. 열린책들 제공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 황금의 땅 엘도라도, 천공의 성 라퓨타, 토마스 모어의 이상국가 유토피아, 불과 얼음의 땅 툴레, 솔로몬 왕을 방문한 세바의 여왕의 나라, 괴도 뤼팽의 기암성, 베트맨의 고담시….

이 장소들은 실제로는 없는 것들이다. 특히 기암성과 고담시는 순전히 허구다. 그러나 나머지는 있다고, 혹은 있었다고 생각했던,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환상의 장소들이다. 인류 문화사 전체를 대상으로 그 목록을 작성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솜씨 좋은 안내자를 만난다면 이 광대한 세계를 돌아다니는 데 쓸모있는 나침반을 얻을 수는 있겠다.

전설의 땅 이야기 ·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발행ㆍ480쪽ㆍ5만5,000원
전설의 땅 이야기 ·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발행ㆍ480쪽ㆍ5만5,000원

‘전설의 땅 이야기’를 쓴 움베르토 에코가 바로 그런 안내자다. 수천 년의 역사를 종횡무진 주유하는 긴 상상 여행을 특유의 백과사전적 지식과 통찰, 세련된 화법으로 이끌고 있다. 세계적인 기호학자이자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에코의 박학다식함은 내놓는 책마다 감탄을 넘어 경악스러울 정도인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한 권의 책이지만, 수 백 권을 읽는 기분이다.

‘미의 역사’ ‘추의 역사’ ‘궁극의 리스트’를 잇는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의 네 번째 책이다. 전작 ‘궁극의 리스트’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무언가의 목록으로 현기증이 날 만큼 찬란하고 풍성한 지적 향연을 펼쳐 보였던 그가, 이번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전설의 땅과 장소로 안내한다. 에덴동산부터 오디세우스가 귀향길에 닻을 내린 섬들, 중세 유럽인들을 사로잡은 사제왕 요한의 나라, 나치 독일이 순수 아리안 혈통의 본향으로 여겼던 툴레, 아서왕 이야기의 캐멀롯 성과 원탁의 기사들이 찾아나선 성배의 행방, 지구의 내부와 북극 신화 속 환상의 장소 등 존재하지 않는 땅으로 떠나는 여행기다. 고대인들이 생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마지막 제 15장에서는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장소, 다시 말해 발견될지도 모르는 장소까지 언급한다. 실재하지만 폐허만 남아 전설이 깃든 장소, 관광 등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설의 후광을 업은 현장도 나온다.

에코는 각 장의 첫머리에서 전체 윤곽을 설명한 다음, 그 내용에 연관된 문헌을 골라 인용문을 붙이고 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와 중세 유럽인들이 상상한 동방의 신기한 나라들을 소개하는 장에 수록한 인용문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토토스의 ‘역사’부터 마르코폴로의 여행기, 19세기 신화학자 아르투로 그라프의 저술까지 13권에서 뽑은 것이다. 인용문 하나 하나를 읽다 보면 수 백 권의 책을 독파하는 듯한 포만감과 그 책들을 죄다 찾아서 읽어보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움베르토 에코. 한국일보 자료사진
움베르토 에코. 한국일보 자료사진

에코는 전설은 전설일 뿐 현실과 무관하다는 생각을 깨뜨린다. 상상이 오늘을 만들었고, 미래를 추동하는 엔진이 될 수 있음을 여기저기서 확인시킨다. 전설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예도 있으니, 나치의 휘장인 하켄크로이츠는 북대서양에 있다는 전설의 섬 울티마 툴레에서 파생된 신화, 히페르보레아와 연결돼 있다. 나치 인종주의자들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근거로 그리스 북쪽 아주 먼 곳에 있다는 완벽한 나라, 히페르보레아를 끌어들여 고대 북유럽의 룬 문자를 바탕으로 하켄크로이츠를 고안했는데, 그 모임의 이름이 툴레협회였다.

전설은 현재진행형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귀국길에 거치는 긴 방랑의 항로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에코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여행에 관한 이론은 80가지나 된다. 오디세우스가 지중해를 넘어 콘월과 스코틀랜드까지 갔고, 따라서 그가 키르케섬에서 마셨다는 포도주는 스카치위스키였을 거라는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1970~90년대 나온 연구에는 그의 방랑이 중국, 일본, 한국까지 이르렀다, 그가 마젤란해협과 호주를 발견했다, 지중해가 아니라 발트해를 헤맸다는 주장도 있다.

책에는 그림, 지도, 사진 등 300여 개의 아름다운 원색 도판이 실려 있다. 애당초 상상의 장소를 묘사한 자료여서 과학적 정확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눈으로 보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대체로 터무니없어 보이고 아주 가끔은 그럴듯해 보이는 수많은 전설의 땅들을 주유하는 동안, 에코는 전설이 어떻게 믿음이 되었는지도 설명한다. 전설은 인간의 욕망과 현실, 세계관의 반영이지, 결코 어리석음의 증거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수만 갈래 골목길과 곳곳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장소들을 만나려면 발품을 팔아 한없이 헤매야 하듯, 이 책을 좀 더 즐기려면 부록으로 실린 참고문헌 목록을 찾아 읽는 것도 좋겠다.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책이 대부분이지만, 에코가 작성한 참고문헌 목록과는 별개로 이 책과 나란히 읽으면 좋을 번역서도 더러 있다.

알베르토 망겔과 잔니 과달루피가 함께 쓴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것에 관한 백과사전’(최애리 옮김, 궁리 발행, 2013)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허구의 장소 1,300곳의 지리ㆍ생태ㆍ역사ㆍ제도ㆍ풍습을 지도ㆍ삽화와 함께 담은 가이드북이다.

14~17세기 유럽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맨더빌 여행기’(주나미 옮김, 오롯 발행, 2014)는 중세 영국의 기사, 존 맨더빌이 1322년부터 1356년까지 바다 너머 신기한 나라들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썼다는, 작가가 실존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한 믿거나 말거나 여행기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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