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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은 자살, 3번은 타살 판정… 끝내 미궁에 빠진 허원근 일병 의문사

입력
2015.09.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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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전방서 M16 소총 실탄

좌우 가슴·머리에 3발 맞고 사망

軍 당시 "복무 염증" 자살 결론

유족 진정으로 2002년 시작한

의문사위 조사에선 "타살" 판단

대법, 항소심 자살 결론에 '부적절'

"부실수사" 국가 책임 일부만 인정

31년간 진실 좇은 유족들 허탈

대법원이 10일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 군 의문사 사건인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고 최종 판단하자, 허 일병의 부친 허영춘씨가 아들의 시신 사진을 내보이며 판결의 부당함을 토로하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ilbo.com
대법원이 10일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 군 의문사 사건인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고 최종 판단하자, 허 일병의 부친 허영춘씨가 아들의 시신 사진을 내보이며 판결의 부당함을 토로하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ilbo.com

국가기관에서 3번의 자살, 3번의 타살 판정을 받은 ‘허원근 일병 사건’이 자살ㆍ타살 여부를 확정하지 못하고 미궁으로 남게 됐다. 마지막으로 7번째 판단에 나선 대법원이 “타살 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지만, 자살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허 일병이 1984년 좌ㆍ우 가슴과 머리에 3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된 지 31년 만이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0일 허 일병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허 일병이 소속 부대원 등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됐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그렇다고 스스로 소총 3발을 발사하여 자살했다고 단정해 그의 타살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다만 “(사건 당시) 헌병대가 필요한 조치를 제대로 취했다면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음에도 직무상 의무 위반으로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됐다”며 원심과 같이 국가가 유족들에게 위자료 3억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항소심은 허 일병의 자살을 인정하고 3억원의 위자료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은 “원심의 판시(자살 결론)에 부적절한 부분이 있으나,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은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원심이 위자료 산정에서 재량의 한계를 이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에서 중대장 전령으로 복무 중이던 허 일병(당시 22세)은 1984년 4월 2일 오전11시 부대 폐유류고에서 좌ㆍ우 가슴과 머리에 3발의 M16 소총 실탄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현장을 조사한 헌병대는 중대장 김모씨의 괴롭힘 등으로 군 생활에 염증을 느낀 허 일병이 오전 9시50분쯤 철책근무 순찰을 나오는 길에 폐유류고로 가서 M16 소총을 이용해 오른쪽 가슴, 왼쪽 가슴, 머리 순으로 3발을 쏴서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후 18년이 지난 2002년 유족의 진정으로 조사를 시작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사건 당일 음주 회식 중에 허 일병이 노모 중사가 쏜 총에 맞아 숨졌으며 사건 은폐를 위해 허 일병의 사체에 추가 사격이 가해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결론에는 한 부대원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헌병대 조사결과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도 타살의 근거로 제시됐다. ▦폐와 간을 관통 당해 치명상을 입은 허 일병이 다시 불안정한 자세로 머리를 쐈다는 내용 ▦현장에 허 일병의 골편 및 혈흔이 있었다고 기록하고는 확인이 불가능한 현장 사진만 첨부한 점 ▦헌병대의 현장 정밀 수색에서 탄피가 2개만 발견 된 점 ▦중대장 김씨가 사건 발생 후 부대원에게 허 일병의 탄창에 실탄 한 발을 삽탄하도록 하고, 이후 월북할 가능성이 제기돼 상부로부터 감시를 받았던 점 등이 자살이 아닌 정황이었다. 사건 당일이 휴가 하루 전이란 사실도 허 일병의 자살 동기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당시 김현태 연대장은 사건 당일 오전 7시 즈음 중대장 전령(허 일병)의 보고를 받았다고 밝혀, 사건 발생 시각에 대한 군의 조사 결과도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런 증거들에 대해 “타살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결정적 증거가 부재한 상황에서 의문사위 조사 중 타살에 부합하는 진술을 했던 부대원들은 이후 국방부 조사 및 법정 증언에서 말을 뒤집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번복해 신빙성을 잃었다.

대법원은 그러면서도 “M16 소총으로 가슴에 2발과 머리에 1발의 총을 쏘아 자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해도, 그 자세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며 “다음날 휴가가 예정돼 옷을 빌리는 등 휴가 준비를 했고 소총 3발을 발사해 자살할 만큼 강력한 자살동기가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자살로 단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의 이 같은 판단으로 허 일병 사건은 영원한 법적 미궁에 빠지게 됐다. 다만 허 일병의 죽음은 이후 군 의문사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건 직후부터 수십 년 간 생업인 김 양식장 일을 제쳐두고 서울과 진도를 오가며 진상규명을 위해 발벗고 나섰던 허 일병의 부친 허영춘(76)씨는 “잘못된 판결이다, 확인사살까지 하고도 그네들(국방부)이 자살이라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그는 “죽은 내 아들이 다시 살아오지 못하더라도 검시 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군대 가서 숨질 경우 자살로 만들어질 것”이라며 “군인들이 안심하고 최전방 철책을 수호할 수 있도록 검시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허씨는 취재진에게 사고 당시 아들의 시신 사진을 내보이며 “국제(기구의) 절차를 거쳐서라도 반드시 자살이 아니라고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김관진기자 spiri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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