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지평선] 정조문의 항아리

입력
2014.08.21 20:00
0 0

‘일본의 간송 전형필’로 불리는 재일동포 1세대 고(故) 정조문 선생이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한 계기는 달항아리였다. 사업으로 돈을 모은 그는 어느 날 교토 고미술품 거리를 걷다가 순백의 도자기에 끌려 가게에 들어갔다. “이조 백자인데 이 정도의 것은 없다”며 애지중지하는 주인을 보고 난생 처음 조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 당시 돈으로 집 두 채 값인 이 항아리를 할부로 구입한 그는 “일본 속의 ‘조선’을 모아 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을 보여주자”고 결심했다.

▦ 정조문은 그 때부터 일본 전국의 고미술 상점을 찾아 다녔다. 고베 부농의 밭에 고려시대 석탑이 방치된 것을 보고 15년 넘게 주인을 쫓아다니며 설득해 구입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를 잘 아는 한 일본인 교수는 “손에 넣을 돈도 없으면서 보지 않고는 못 배기고, 보면 만지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괜찮은 물건이다 싶을 때 손에 넣지 못하면 병에 걸리고 만다”고 했다. 1988년 그는 30여 년간 수집한 골동품 1,700여 점을 모두 헌납하고 자신의 집을 헌 자리에 미술관을 지었다.

▦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정조문은 6살 때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친의 독립운동으로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3학년만 마치고 노동판을 전전하다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생전에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 “남도 북도 내 조국이고 고향인데 어디로 돌아가겠느냐”며 통일되기 전에는 바다를 건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미술관 이름을 고려미술관으로 한 것도 고려가 통일국가였기 때문이다. 1989년 운명할 때까지 국적은 도일 때의 조선적(籍) 그대로다.

▦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가 제작되고 있다. 영화 제작비는 순수한 일반인의 모금으로만 충당하고 있다. 500명을 목표로 지난해 말 모금을 시작해 현재 300명에 달할 정도로 호응이 높다. 후원자 가운데 3분의 1이 일본인이다. 그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 데 앞장 선 불교미술사학자 최선일 박사는 “고려미술관을 찾는 연 1만 명의 관람객 대부분이 일본인인데 한국에서는 정조문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국을 떠나 온갖 설움과 핍박 속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한 정조문을 비롯한 많은 재일동포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