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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리꾼 박동진 명창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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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리꾼 박동진 명창 타계

입력
2014.07.07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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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小史]

제144회 - 7월 둘째 주

국악 대중화에 앞장선 박동진 명창이 팔순을 바라보는 90년대 초, 우렁찬 목소리로 판소리 ‘변강쇠 타령’을 완창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악 대중화에 앞장선 박동진 명창이 팔순을 바라보는 90년대 초, 우렁찬 목소리로 판소리 ‘변강쇠 타령’을 완창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쿵~떡’하는 북소리와 함께 판소리 ‘흥보가’의 구성진 대목이 흥을 돋군다.

1992년, 한 제약회사 광고에 출연해 호탕한 목소리로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웠던 인간문화재 박동진 명창이 2003년 7월 8일 충남 공주 ‘판소리 전수관’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87세.

특유의 입담과 해학으로 80세가 넘도록 현역으로 활동하며 국악 대중화에 앞장섰던 박명창은 ‘토막소리’위주이던 판소리계에 ‘완창’이라는 새 바람을 일으킨 한국 판소리의 대들보였다.

1916년 충남 공주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박명창은 대전중학교 시절 우연히 당대의 명창이던 이화중선 이동백 등이 출연한 공연을 본 후 본인의 말을 빌면‘눈깔이 홀랑 뒤집히는’희열을 접하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춘향가의 대가 정정렬을 찾아 계룡산을 오르고, 수궁가의 유성준을 찾아 경주를 찾아 헤맸으며 동편제 판소리명창 송만갑에게도 소리를 전수받았다. 하지만 그는 판소리계에서 분류되는 어느 계보에도 속하지 않은 창조적 개혁자였다.

약관의 나이에 각 계보의 스승으로부터 소리를 전수받은 박명창은 20대 후반 무절제한 생활로 목소리를 잃고 만다. 제 소리를 찾기 위해 홀로 토굴에 들어가 생쌀을 씹어먹으며 40여일 동안 소리만 질러댔더니 얼굴과 몸이 퉁퉁 부어 올랐고 ‘소리독에는 똥물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부친이 가져온 삭은 똥물을 마시고 부기를 뺐다는 일화는 국악계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토굴생활 백일을 꼬박 채우고도 목소리를 찾지 못한 그는 이후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소리 공부에 전념했고 6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취직하며 본격적인 판소리에 정진해 마침내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게 됐다.

68년, 쉰이 넘은 나이로 일생일대의 실험인 ‘흥보가’완창에 도전한 박명창은 “말도 안 된다’는 국악관계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장 다섯 시간 반에 걸친 완창 무대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하이라이트 부분만 공연하던 기존 판소리 판도를 뒤집어놓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72년까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춘향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차례로 완창했고 당시 잊혀져 가던 판소리는 후배들에게 이어지며 새로운 예술장르로 거듭났다.

73년 ‘적벽가’로 인간문화재에 오른 후에도 끊임없이 무대에 올라 해학과 재담, 때로는 음담패설과 욕설을 섞어가며 대중을 휘어잡던 그는 98년 고향 공주에 ‘판소리 전수관’을 열어 후학양성에 매진하던 중 눈을 감았으니 본인의 바람처럼 평생 소리꾼으로 살다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정부는 박명창 타계 다음날인 7월 9일, 문화예술분야의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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