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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치고 배 터지게 드셨소? 그래도 잘 쉬다 갔으면 되얐소!

입력
2014.08.1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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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손님 안와요?" "아내 친구들, 내 친구들 잘하면 두 팀이다"

구례로 귀농 이후 3년간 찾아온 손님만 500명 넘어 손님 유형도 가지가지

숯불 피워 배 터지게 고기 먹고 가족들의 불편은 상관없이 여친이랑 자고 간다는 후배

농막 청소 싹 해놓거나 필요한 물건 슬쩍 갖다 주는 '개념 손님'은 손에 꼽을 정도

필자(가운데)를 찾은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 두 병 들고 파전 부쳐 인근 계곡을 찾았다. 적당량의 술을 곁들인 휴식은 생활의 활력이 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되는 게 확실하다.
필자(가운데)를 찾은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 두 병 들고 파전 부쳐 인근 계곡을 찾았다. 적당량의 술을 곁들인 휴식은 생활의 활력이 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되는 게 확실하다.
농장에서 일을 돕고 간 손님들이 자신이 사용했던 목장갑들을 깨끗이 빨아 널어 놓았다.
농장에서 일을 돕고 간 손님들이 자신이 사용했던 목장갑들을 깨끗이 빨아 널어 놓았다.
구례를 방문한 아내 친구와 가족들이 지리산 피아골 캠핑장으로 필자 가족을 초청해 얘기 꽃을 피우고 있다. 자연에서의 식사는 가끔 시간가는 줄 모른다.
구례를 방문한 아내 친구와 가족들이 지리산 피아골 캠핑장으로 필자 가족을 초청해 얘기 꽃을 피우고 있다. 자연에서의 식사는 가끔 시간가는 줄 모른다.

“비 오는데 뭐 하는가?”

동네 형님에게서 점심 나절에 전화가 왔다. 내가 뭘 하는 지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술 한 잔 하러 오라는 명령이다.

“뭐 하긴요. 비 쳐다보고 있죠.” 모처럼 재활용품 정리를 하던 내 입에서 말 같지 않은 대답이 나왔다. ‘어디로 갈까요’와 같은 대답인 걸 아는 아내가 눈은 나한테 두고 고개만 살짝 돌린다. 흘기는 거다. 자칫 눈을 거의 마주칠 뻔 하다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웃몰(윗 마을) 형님이 어젯밤에 멧돼지 잡았다네. 준비하고 있응게 오소.”

통화하는 동안 아내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걸 보니 여전히 눈이 맞닿기만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팔짱도 끼고 있을 거다. 자석처럼 끌려가려는 눈에 힘을 주며 버틴다.

“뭐 하던 게 있어서 마무리 하고 올라갈게요. 필요하신 건 없대요?” 아내 눈치 좀 보다가 타이밍 잡아서 올라가겠다는 얘긴데 알아들었을까 모르겠다.

전화 끊자마자 아내가 좋게 말한다. “힘들어 하면서 이런 날이라도 좀 쉬어야 되지 않아?” 웬만한 수식어는 다 생략하고 정말 좋게 말하는 거다. 이렇게 얘기해 주면 고맙기도 한데 무섭기도 하다.

“그냥…잠깐 거…그니까…” 말솜씨 있다는 말 좀 듣는 편인데 이런 상황에선 그저 더듬거릴 뿐이다.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슬리퍼에 발을 꽂는데 아내가 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많이 마시지 마. 몸도 안 좋으면서.”

그런 말이 더 고맙고 더 무섭다. “조금만 있다가 금방 올게.” 오늘은 계속 말 같지 않은 말만 한다.

“어이 동생, 자네는 비 오는 날 먼저 전화하면 큰 일 난당가. 워째서 꼭 형이 전화하게 만드는겨.” 형님들은 별게 다 서운한가 보다.

“형님 쉬시는 데 방해될까 봐 그러죠.” 변명치고 군색하다.

“이번 주말에 섬진강에서 물고기 좀 튀겨먹을라고 하는데 제수씨랑 같이 가세.” 한 모금 하고 술 잔을 내려 놓는데 형님이 한 마디 더한다. “참 자네는 어찌 술을 베어 묵는당가. 재주도 좋네.” 원 샷이 기본인데 잔에 술이 남았다 이거다.

바로 마저 비웠다. “주말에 손님 와요. 집사람이랑 친한 친구들이요.”

소주잔은 간지럽다고 종이컵으로 바꿔 따라주며 형님이 말한다. “자네는 서울에서 잘 살았는갑네. 넘들은 2년이면 대강 손님 끊기더만 뭐이 그리 맨날 손님이댜. 그만들 오라 그랴.”

칭찬인지 타박인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대꾸하기가 힘들다. “그러게요…”

먹을 만큼 먹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아내가 나를 쳐다보더니 1초 만에 스캔을 끝내고 통화를 계속한다. “아니야. 그건 됐구 혹시 마트 갈 일 있으면…” 주말에 내려오는 친구에게 뭔가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이다. 전화기 내려놓는 아내에게 말했다. “남원이나 순천 갈 때 사면 되지 뭘 사 오라고 그래. 부담 느끼게시리.”

술김에 너무 용감했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반격이 들어온다. “뭐 필요하냐고 물어서 됐다고 그랬다가 얘기한 거야. 얘기 안 하면 뭐라도 사올텐데 그러느니 필요한 거 말하는 게 나으니까. 당신 친구들은 물어보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내의 공격이 계속 파고든다. “유헌씨 친구들을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실 내 친구들이 더 개념이 있는 것 같지 않아?”

개념? 뭐에 대한 개념. 그거 군대 용어인데? 아내가 군필자였나? 내 친구들은 개념이 없다고? 생각해 주는 게 다르다 이거겠지.

비 핑계로 하루 쉬려고 맘 먹었는데 안개처럼 뿌리던 비가 멎었다. 일하기 딱 좋은 날씨로 돌변한 거다. 한 잔 걸쳤으니 몸은 풀어지고 눈이 쳐지기 시작했다. “아 참내, 비가 온다고 했으면 제대로 와야지 왜 오다 말고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거야.” 혼자 궁시렁 대는데 빨래 정리하던 아내가 들었나 보다. “쉬기로 했으면 그냥 푹 쉬어. 오랜만에 낮잠을 자든지. 괜한 하늘에다 시비 걸지 말고.” 나는 헛소리가 늘어가고 아내는 옳은 말만 늘어간다.

농장 가서 고추에 뿌릴 약초라도 삶아야겠다 생각하고 터덜터덜 집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유헌아, 나야. 이번 주말에 가족이랑 구례 내려가려고 하는데. 별일 있냐?” 농사 짓는 사람한테 별일 생기면 좋은 게 아니구만 3년 만에 처음 전화한 놈이 막 말을 한다.

“별일은 없구 아내 친구들이 온대. 겹치겠는데?” 녀석은 막무가내로 이어간다. “너네 농장에 농막 있다며. 비도 계속 온다는데 거기서 고기나 구워먹지 뭐. 구례 흑돼지 맛있다고 그러던데.”

우리나라 사람들 DNA에는 고기에 대한 한이 맺혀 있나 보다. 못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니면서 집만 나서면 고기 먹을 생각만 하고 그것도 꼭 연기 피워가며 구워 먹어야 성이 차나 보다. 생선회도 먹을 줄 아는데 “회 떠오랴” 물어보는 놈은 없다. “불편할 텐데” 했더니 “괜찮아, 우린 캠핑을 하도 많이 해봐서 불편한 건 얼마든지 견뎌. 술 좋은 거 가져갈게 오랜만에 찐하게 한 잔 하자.” 아내가 개념 운운했던 게 묘하게 들어맞는 느낌이 들어 언짢았다.

농장에 들어서니 못 보던 승용차가 한 대 와 있었다. 옆 마을 후배였다. 약초 삶을 압력밥솥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빨리도 왔다. “고추 잘 되얐네 행님”하며 내려 오길래 “이건 왠 차냐?” 물었더니 “원래 있던 차예요 행님” 하며 씩 웃는다.

“너 혼자면서 트럭 있는데 뭐할라고 승용차가 필요하냐. 세금에 보험에 힘들겄다”는 잔소리에 “그렇잖아도 팔려구 그래요 행님” 한다. 어머니가 반대 하시는 걸 기어코 샀는데 지금은 괜히 샀다 싶단다. 그러면서 “차 사서 끌고 오니까 엄니가 뭐라고 했는지 아요?” 묻길래 “뭐라 그러시대. 연 끊자 그러시지 않든?” 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차를 한참 보시던 어머니는 후배보고 “그려 속이 씨언허냐?” 물으셨단다. 고개만 끄덕였더니 등짝을 후려 때리시며 “되얐다 그럼!” 하고 끝내셨단다. 그 후배 뒤끝 없는 게 어머니 닮아서란 걸 알았다.

후배는 부탁한 솥을 꺼내며 “행님, 이번 주에는 손님 안 온대요? 피아골 가서 백숙이나 먹게요” 한다. 솥 받아 들며 “잘 하면 두 팀 되겠다” 했더니 “행님, 이제 손님 오면 돈 받아요. 숙박비건 물값이건. 고추 농사보다 낫겄네. 근데 손님도 가지가지죠 행님? 보기 싫은 사람도 있을텐디…”

따져보니 구례 내려와서 3년간 찾아 온 손님이 연인원으로 500 명이 넘는다. “못 가봐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이 아직 있으니까 대기 중인 새 손님도 꽤 되는 편이다. 손님으로 맞이하다 보면 도시에서 생활할 때는 몰랐던 면면을 알게 되기도 하고 대부분’ 깨진 바가지 어쩔 수 없구나’ 하게 된다.

아내가 얘기하는 ‘개념 손님’은 사실 몇 없다. 내 손님 중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다 무개념 손님이란 뜻은 아니다. 전화 통화만도 반가운데 얼굴까지 보게 되면 찾아와 준 것 만으로도 고맙고 기쁜 일이다. 일부러 찾아 온 게 아니고 지나가는 길에 들러 주는 것만도 짧아서 아쉽고 떠날 때 서운한 게 인지상정이다. 한 번은 후배가 전화해서 “형, 출장왔다 올라가는 길인데 들렀다 갈게요”하길래 “그래라, 어딘데?” 했더니 “막 부산에서 출발했어요. 금방 도착해요”한다.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겠나. 밥솥 후배가 말한 ‘손님도 가지가지’가 맞는 얘긴 것 같다.

시골에 필요할까 싶은 거 바리바리 챙겨서는 전화도 없이 슬쩍 농장에 들렀다가 물건만 놓고 가는 ‘마니또 손님’도 있고, 논에 있으니 잠깐 농막에서 기다리라는 사이에 청소까지 해 놓는 ‘우렁각시 손님’도 있다. 다짜고짜 차에 타라고 하고는 자기가 아는 맛 집에 가서 푸짐하게 먹여주는 ‘먹방 손님’까지 여러 종류의 좋은 손님들이 있다. 그런데 극소수다. 그 외 대부분은 고위직 시찰형, 현지인 이용형, 거점 활용형, 먹고죽자형, 눈치제로형 등 다양하다.

친분은 별로 없으나 한 다리 건너 알고 있는 어르신이 오셔서 “얘기는 들었네. 불편한 건 없고?”로 시작해서 당신이 다녀본 외국이 몇 나라고, 그 나라의 사례는 어떻고, 본인이 생각하는 귀농은 ‘이래야 한다’로 이어지다가 “여기 밥 먹을만한 데 어디 있나”로 마무리 하시고는 금일봉 대신 “그래, 내 지켜봄세” 한마디만 남기고 가는 분들이 있다.

또 전화해서는 “어이, 우리 모임에서 한 2박3일 단체로 그 쪽에 가려구 하는데 어디 좋은데 좀 알아봐줄래” 도움을 요청하는 식이다. 예민한 여자가 몇 있으니 이랬으면 좋겠고, 갓난 아기가 있으니 저랬으면 좋겠다고 수 차례 추가 전화를 한다. 성수기 때라 어렵게 뚫어서 예약을 도와주니 저녁 자리에서 고마움을 표시한다고 꼭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한다. 마지못해 가면 구석자리에 앉혀 놓고는 열심히 지들끼리 놀다가 기분 쓰듯이 “아 이쪽이 구례 사는 제 후밴데 우리 숙소와 일정을 도와줬습니다 이 친구를 위하여 건배!” 여자들도 콧소리로 “고맙습니다~” 하고는 또 지들끼리 잘 논다. 이런 경우, 슬그머니 빠져 나올 방법과 시기를 선택하는 게 좀 어렵다.

그 외 대다수는 “너 믿고 그냥 왔어. 화로랑 테이블이랑 의자만 좀 빌려줘” 하는 경우와 1인당 고기 한 근과 3박4일 간 먹을 만큼 먹거리를 사서는 새벽 3시까지 조는 사람 붙잡고 숯불 연기 먹이다가 남는 건 하사품처럼 주고 가는 경우다.

간혹 여자 친구를 데려와서는 집에서 재워 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도 있다. 고기 구워서 저녁 잘 먹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오랜만에 봤으니 집에서 한 잔 더 하다가 자겠단다. “얌마, 여자 친구랑 여행 와서 이러면 안 되지.” 나름 강하게 얘길 해도 “형, 저는 괜찮아요. 얼마만인데 좀 더 놀아요. 얘기할 것도 많고.” 영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그래도 이건 매너가 아니잖니. 벌써 12시다. 숙소 잡는 거 도와줄 테니까 나가자. 불편해”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도 못 알아 먹는다. “형, 우린 불편한 데서 자도 괜찮아요. 내가 형 보러 왔지 뭐 여자친구랑 자러 왔나.” 이게 아주 먹통이다. “야이 자슥아! 니 네가 아니라 우리가 불편해. 알아듣겠냐? 나랑 우리 가족이 불편하니까 나가서 자라고 이 XX야!” 이제야 이해가 되는 지 멋쩍게 웃으며 일어선다. 미안하지만 방법이 없다.

솥 들고 왔던 후배가 단소 강습일정을 알려 주며 “행님, 제가 단소 강사니께 잘 해 드리께라. 이번에 함 배워 두시쇼.” 이번 꼬임은 넘어가 볼까 하는데 후배가 씩 웃으며 덧붙인다. “행님, 손님들 땀시 너무 힘들어 마요. 우리 엄니 겉으면 뭐라고 했으까… 생각허고 그리 허씨요.”

그려, 엄니 따라서 나도 소리나 한 번 질러 볼란다. “어이 손님네덜, 구례 내려와서는 편안히 쉬다가 좋은 공기에 좋은 물 마시고 좋게 돌아가시면 좋겠소만, 배 터지도록 고기랑 연기 먹고 가니 속이 시언~헙디까? 되얐소 그럼!”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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