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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예술은 사실 밀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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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예술은 사실 밀회하고 있었다

입력
2014.08.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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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 그림 '세월오월' 파문 속, 정치적 예술 해묵은 논쟁에 대안 제시

"예술은 미술관, 정치는 의회에 있다는 이분법은 파열되어야 할 허구"

‘문학의 아토포스’ 펴낸 진은영 시인. 강다연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4)
‘문학의 아토포스’ 펴낸 진은영 시인. 강다연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4)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그림 ‘세월오월’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족과 싸우는 모습을 그린 그림에 비엔날레 측이 전시 유보를 결정하면서 작가들은 작품을 철수했고 비엔날레 대표는 사퇴를 선언했으며 그림을 그린 홍성담 씨는 명예훼손으로 고발됐다.

예술과 정치를 둘러싼 이 오래된 논란 속에 또 하나 오래된 것이 있다면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시비다. 미술평론가 임근준 씨는 이 그림에 대해 “몹시 시대착오적이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운 파국을 빚어내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 “홍성담 씨가 뭘 그리든, 민주화의 혜택을 받고 사는 우리는, 참고 바라보는 게 예의임”이라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참고 바라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림을 본 이들이 찡그린 얼굴을 애써 감췄다면, 그것은 철 지난 민중예술에 대한 권태일까 아니면 정치적 효용성 때문에 방기된 예술성을 봤기 때문일까.

진은영 시인이 낸 ‘문학의 아토포스’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해묵은 대립에 ‘오늘날’의 답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답한다기 보다는 파열시킨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데, 시인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예술을 정치적 예술이라 부르는 기존 프레임을 깨부수고 정치와 예술이란 단어를 재정의하길 촉구한다. 그는 두 개의 개념 즉 “정치는 특정 체제 안에서 권력을 점유하는 일이 아니라 그 합의의 체제를 넘어 새로운 분배의 방식을 끊임 없이 모색하는 일”(자크 랑시에르)과 “문학은 언어를 통해 기성세계의 합의된 질서에 불일치를 제기하는 모든 활동”(김수영 시인)을 나란히 불러 세워 정치와 예술의 필연적 만남을 암시한다. 기성 질서에 대한 전복이라는 지점에서 예술과 정치가 “사실은 밀회하고 있었다”는 시인에게 두 영역의 합일이 공고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뭔지 물었다.

_2008년부터 불거진 문학과 정치 논란의 선두에 있었다.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어떤 결론에 도달했나.

“예술은 미술관에, 정치는 의회에 있다는 이분법의 허구성을 파열시키고자 했다. 이런 틀 안에서는 정치와 예술 중 양자택일만이 가능하다. 한국 문단에서는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지만 용산에서 시를 읊으면 논란이 된다. ‘이것도 문학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술과 정치의 공통점으로 ‘기성 체제와의 불화’를 규정한 랑시에르의 이론이 해결점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_단어를 재정의해 틀을 깨는 랑시에르의 개념은 해방감을 선사하지만 현실에서 정치와 예술의 합일이 이뤄지려면 그의 개념이 보편적으로 수용돼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게 가능할까.

“새로운 것은 늘 소수에 의해 시작된다. (기존 담론에) 파열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 시작하고 유행이 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이런 파열에는 보통 시작하는 힘뿐 아니라 퍼뜨리는 힘이 포함돼 있다. 물론 누군가는 이걸 (문학의) 타락이라고 부른다.”

_문제를 제기하는 진영의 논리는 무엇인가.

“정치적 발언을 비미학적이라 여기는 문학적 순수주의가 여전히 팽배해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건 계간지에 시를 발표해 좋은 평가를 받는 것 말고 다른 장소에서 문학 활동을 함으로써 그게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내가 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게 내 삶을 변화시키고 문학을 더 멀리 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용산은 윤리로 무장한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시도 시인만 쓰는 것이 아니다.”

_타락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논란의 여지는 확실히 있을 듯 하다. 시의 소비자가 아름다운 글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나.

“심보선 시인이 시 쓰는 70대 할머니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문맹으로 살다가 뒤늦게 글을 깨우쳐 500편이 넘는 시를 쓴 할머니의 사연인데 그런 이야기가 감동적이기는 해도 미학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따른다. 나는 영감을 받은 특정계층만 시를 써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시인도 등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감상의 대상이 아닌 활동의 대상이다.”

_예술과 정치의 소통을 막는 우리 삶의 장애물이 있다면 뭘까.

“삶의 선들이 구획화돼 있다. 학생은 학교, 학원, 집, 회사원은 직장, 집 외에는 좀처럼 갈 곳이 없다. 나만 해도 학교와 집만 오간다. 융복합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섞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딴짓하기 힘들만큼 척박한 시대라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이 자기 시를 바꾸는 방법은 작품 활동과 문예지 발표의 쳇바퀴를 벗어나 자기 삶 밖으로 나가는 것뿐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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