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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피에호프스키(6월20일)

입력
2017.06.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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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인 비에호프스키가 1942년 6월 20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했다. alchetron.com
폴란드인 비에호프스키가 1942년 6월 20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했다. alchetron.com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적잖은 탈출 시도가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우 공식적으로 모두 802명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들은 SS친위대 군인의 총을 빼앗아 저항 끝에 사살되기도 했고, 변장을 시도하기도 했다. 울타리를 벗어난 이들은 대부분 반나절, 길게는 몇 달 내에 다시 체포돼 총살형을 당했다. 탈출에 성공한 이는 모두 144명. 331명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1942년 6월 20일 가장 극적이고 과감한 탈출이 감행됐다. 폴란드인 카지미에시 피에호프스키(Kazimierz Piechowski, 1919~)는 우크라이나 출신 유지니우츠 벤데라(Eugeniusz Bendera, 1906~1988) 등 3명과 함께 친위대 장교복을 입고 수용소장이 타던 슈타이어(Steyr 220) 승용차로 ‘Arbeit Macht Frei,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정문을 당당히 통과했다. 당시 그들에게는 물론 통행증이 없었지만, 정문 보초병들은 그들이 익히 아는 차와 피에호프스키의 호통- “(빨리) 열지 않으면 몸을 열어주겠다!(Open up or I’ll open you up!)”고 했다고 한다-에 눌려 차단봉을 올렸다. 그들이 선택한 승용차는 최고 가속력을 자랑하던 최신ㆍ최고급 승용차였지만, 중요한 건 속력이 아니라 위용이었고, 그들의 기지와 배짱이었다.

폴란드 드체프(Tczew) 출신 23세 청년 피에호프스키는 자신이 10살 무렵 가입해 익힌 ‘보이스카우트’ 정신이 저 모든 것을 이룬 동력이었다고 훗날 말했다. 갓 독립한 조국의 청소년단체가 회원들에게 고취한 독립심과 애국심, 단결과 용기. 전쟁은 9년 뒤 발발했고, 그의 마을은 4일 만에 점령 당했다. 그는 간신히 도피했지만 헝가리 국경 근처에서 체포돼 8개월간 여러 감옥을 거친 뒤 갓 문을 연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 아우슈비츠의 첫 수감자는 유대인이 아닌 폴란드 정치범들이었다.

그의 유창한 독일어 능력이 큰 도움이 됐다. 만 2년의 수감생활 동안 그는 언어 능력 덕에 시신 운반과 창고 관리 등 다양한 업무에 투입됐다. 벤데라를 만나 친구가 된 것도 그 과정에서였다. 벤데라가 다음 처형자 명단에 포함된 것을 알게 된 그는 탈출을 결심, 쓰레기 처리반으로 위장해 울타리를 벗어난 뒤 창고에서 장교복과 무기, 차량을 훔쳐 탈출을 감행했다.

피에호프스키는 우크라이나를 거쳐 폴란드로 다시 잠입, 폴란드국방군 파르티잔으로 활약했고, 종전 후 공산 폴란드에서 국방군 경력이 문제가 돼 다시 7년간 옥살이를 했다. 33세에 출옥해 기술자로 살았고, 동구 민주화 후 두 권의 책을 썼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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