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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재벌이 진화하는 방식

입력
2015.08.19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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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사태 유일한 소득은 지배구조 혁신

삼성 SK도 외부충격 통해 투명화 개선

이젠 자발적 변화할 수 있어야

'막장드라마'를 연출했던 롯데그룹 형제의 난이 한창이던 지난 11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bo.com
'막장드라마'를 연출했던 롯데그룹 형제의 난이 한창이던 지난 11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bo.com

국내 대형 재벌 가운데 지배구조가 가장 명료하다고 평가 받는 곳이 SK그룹이다. 다른 그룹들이 수십 년 동안 쌓여온 거미줄 순환출자구조를 두고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SK는 2007년 일찌감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물론 초창기엔 지주사(SK㈜) 위에 또 하나의 회사(SK C&C)가 있는 기형적 구조였고 이 옥상옥(屋上屋)은 올해 에야 양사 합병으로 해소됐지만, 그래도 SK가 타 재벌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진보적인 지배구조를 갖추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SK가 지배구조 이슈에 일찍 눈을 뜨게 된 건 온전히 자발적인 것도, 남다른 선지적 통찰력을 갖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만약 소버린 사태가 없었다면 SK도 여태껏 계열사끼리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힌 낡은 시스템을 그대로 갖고 있었을 것이다. 2003년부터 약 2년에 걸쳐 헤지펀드 소버린의 거친 공격을 받으면서, 실제로 경영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극심한 두려움을 겪으면서, 최태원 SK회장은 어떻게든 지배구조를 좀 더 투명하고 심플하게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비록 소버린의 행태는 괘씸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지불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지배구조를 뜯어고친 건 값진 결실이었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는 삼성에겐 더 이상 입에 담기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재앙이다. 글로벌 삼성의 신뢰와 투명성은 땅에 곤두박질쳤고, 이건희 회장과 그룹 최고실세였던 이학수 부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개별기업 비리사건으로 특검이 실시되는 사법사상 초유의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삼성은 낡은 관행을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무엇보다 이병철 창업주 시절부터 내려온 천문학적 규모의 차명주식을 모두 정리했다. 만약 이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그 많은 차명주식은 여태껏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다면 순환출자해소나 이재용 부회장 승계작업은 훨씬 복잡하고 더디게 그리고 더 많은 비용을 수반하며 진행됐을 것이다. 적어도 소유지배구조의 정상화와 투명성 제고 측면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삼성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이자 촉매제였다.

‘막장드라마’를 연출했던 롯데그룹 형제의 난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완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아버지를 앞세워 의기양양하게 도전장을 내민 형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은 초라하게 물러났고, 모든 게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남은 건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오명뿐.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은 판단력을 잃은 힘 없는 노인임이 드러났고, 두 형제는 경영권 앞에 최소한의 우애마저 망각한 탐욕스런 자본가가 되어 버렸다. 롯데는 투명성과는 거리가 먼 국적불명의 기업으로 비춰지게 됐다.

승자 없는 패자뿐인 전쟁이었지만, 그래도 한가지 얻은 게 있다면 신동빈 회장이 약속한 지배구조 혁신이다. 그는 400개가 넘는 순환출자고리 가운데 80%를 해소해 연내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롯데 창사 이래 가장 전향적 조치가 될 것이다. 만약 이번 형제의 난이 없었다면 과연 롯데 오너일가가 자발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까. 아마 롯데는 다음 세대에서도 돋보기로 들여다봐도 해독하기 힘든 순환출자고리를 그대로 떠안고 갔을 게 틀림없다.

어쩌면 이게 역사가 발전하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점진적으로 하나씩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낡은 모순과 오류들이 쌓이고 쌓여 한꺼번에 폭발하고, 고통과 치욕을 거치며 어쩔 수 없이 대안을 찾아가는 것.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우리나라 재벌들도 이런 식으로 성장하고 진화해온 게 아닐까 싶다.

100%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재벌 지배구조나 투명성도 나아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래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건 왜 미리미리 바꾸지 못하는지, 꼭 공격을 받고 싸움을 거쳐야 변화를 택하는 고비용ㆍ저효율의 선택을 하는지.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기업, 그런 기업이 진짜 일류기업이다.

이성철 국차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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