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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보고, 낯설게 보고, 보는 나를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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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보고, 낯설게 보고, 보는 나를 돌아보고

입력
2015.01.1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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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구도로 거리 사진 찍는 폴 오스터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세히 보면 세상을 납득하고 오래보면 그것을 이해하게 돼

영화ㆍ음악ㆍ카툰ㆍ공연기획…

전방위 창작자 이랑씨를 보면 '흥, 이런 것쯤 나도…' 생각하지만 실제 이루기는 결코 쉽지 않아

창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관찰’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끝내 창작물을 완성해내고야 말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결과물을 좋아해주면 좋겠다는 소망도 중요하지만, 믿음과 소망과 관찰 중에 그 중에 제일은 관찰이다. 재치와 끈기와 열정과 야심이 불타올라도 관찰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관찰은 창작자로 출발하기 위해 제일 먼저 가동시켜야 할 엔진이자 가장 늦게까지 타올라야 할 불꽃이다. 관찰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관찰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다. 간단하게 들리지만 ‘주의하여 자세히 살핀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보는 걸로는 부족하다. 주의하여 봐야 하고, 자세히 봐야 한다. 남들과 똑같은 걸 보지만 결국엔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봐야 하고, 더 오래 봐야 하고, 더 많이 움직이며 봐야 한다. 관찰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스모크’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관찰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브루클린의 담배 가게 주인인 ‘오기 렌’은 12년 동안 매일 아침 7시 정각에 똑같은 프레임으로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매일 똑같은 시간의 그물에 담긴다. 어느 날 그는 단골손님인 소설가에게 자신이 찍은 4,000장이 넘는 사진을 보여주게 되는데, 소설가가 사진집을 너무 빨리 넘기자 이렇게 말한다. “너무 빨리 보고 있어. 천천히 봐야 이해가 된다고.” 대체 오기 렌은 뭘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것일까. 빨리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소설가 폴 오스터는 설명해주지 않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오기 렌의 말은 관찰을 설명하는 중요한 문장이다. 너무 빨리 보지 않고, 천천히 봐야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속도를 늦추기만 해도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휴대전화 카메라의 슬로모션 기능을 써보면 세상이 얼마나 낯선지 알 수 있다. 그토록 많은 빗방울들이 한꺼번에 일제히 세상에 쏟아져 내리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자전거 바퀴가 쓰러지지 않고 달리는 것은 또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천천히 보면서 이해하게 된다.

관찰이란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세히 보면서 세상을 납득하게 되고, 오랜 시간 보면서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대충 보게 되고, 대충 보는 것은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식상한 비유가 서너 번 반복되는 것 같으면 책을 덮어버린다.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좋은 이야기꾼은 좋은 비유를 쓴다. 좋은 소설가는 세상을 낯설게 본다. 세상을 뻔하게 보는 작가는 신뢰할 수 없다. 신춘문예나 문학상 심사를 했던 작가에게서 “작품의 ‘직유나 은유’ 몇 개만 봐도 수준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내가 심사위원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

글 쓰는 사람들의 참고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상투적인 비유를 쓰는 작가들에게 짜증을 낸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내달렸다. 그녀는 ‘꽃처럼’ 예뻤다. 그 사람은 ‘유망주’였다. 밥은 ‘호랑이처럼’ 싸웠다. …… 이렇게 케케묵은 표현으로 내 시간을 (그리고 누구의 시간도) 빼앗지 말라. 이런 표현을 쓰는 작가는 다만 게으르거나 무식해 보일 뿐이다.” 뜨끔하다. 솔직히 글을 쓰는 작가로서 저런 돌직구를 피해 갈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모든 문장이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건 힘든 일이고, 모든 비유를 생전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쓰기란 불가능하다(솔직히 스티븐 킹조차 그렇다). 다만 모든 작가들은 뻔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조금이라도 새롭게 보고, 더 정확하게 보길 원할 뿐이다(지금까지 내가 쓴 문장에도 낡은 비유가 수두룩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걸 찾아내려고 처음부터 다시 읽지는 마시길).

우리는 세상을 관찰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한다. 세상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다. 세상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하는 일은 깊이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다. 깊이 생각하는 일은 빨리 판단해야 하고 비판해야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지만 자신을 관찰하는 일은 천천히 바라보는 일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은 오로지 비판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성공하면 평상시 파악할 수 없었던 수많은 생각들이 의식에 떠오른다.”

글을 쓰면서 가장 괴로운 순간은 새로운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때다. 이야기가 막히면 어떻게라도 풀어낼 수 있는데, 비유와 묘사가 막히면 도무지 방법이 없다. 그럴 때면 글쓰기를 잠깐 쉬고 산책을 다녀 와야 한다. 새로운 것들을 보고 만져야 새로운 표현이 떠오른다. 이야기란 묘사와 비유로 만든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 같은 것이어서 뻔한 방향으로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는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기 힘들다. (잠깐만! 뭔가 이상하다.) 여기까지 썼다가 나는 생각을 고쳐서 생각한다. ‘묘사와 비유로 만든 레일’ 그리고 ‘이야기란 그 위를 달리는 기차 같은 것’이라는 비유가 새로울 수는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묘사와 비유를 레일에 비유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일까. 묘사와 비유가 이야기의 중요한 토대라는 점에서는 옳은 방향일 수 있지만 과연 묘사와 비유가 레일 같은 것일까. 오히려 묘사와 비유는 이야기의 옷 같은 것이 아닐까. 묘사와 비유로 이야기에다 옷을 입힌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쳐서 써보자. 묘사와 비유는 이야기의 속옷 같은 것이어서 어떻게 쓰냐에 따라 이야기가 무척 야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산책을 좀 다녀 와야겠다.

영화감독이자 뮤지션이자 카투니스트이자 공연 기획자이기도 한 이랑씨를 만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방으로 뻗어 있는 관심이 창작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해서였다. 이랑씨는 모든 일을 쉽게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랑씨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흥, 집에 가면 이런 음악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랑씨의 만화를 보고 있으면 ‘흥, 집에 가면 이런 그림, 나도…’라고 생각하게 되고 영화나 공연을 봐도 ‘흥, 집에 가면…’ 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모든 게 쉬워 보이고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좌절한다. 쉬운 게 아니다. 할 수는 있지만 이랑씨처럼 잘하기는 어렵다. 이랑씨처럼 편안하게 하기는 어렵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랑씨의 창작의 비밀은 ‘관찰’이 아닐까 싶었다.

이랑씨는 요즘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하고 있는데, 첫 번째 앨범에 수록된 ‘프로펠러’라는 곡의 뮤직 비디오를 수십 번 돌려 본 사람으로서(무척 아름답고도 슬픈 뮤직 비디오다) 두 번째 앨범의 뮤직 비디오도 무척 기대가 된다. 콘셉트가 재미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동작’을 노래와 함께 담는 것이다. 이랑씨는 오랜 시간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바느질을 하는 70대 할머니를 찾아가기도 했고, 창문도 없는 연구실에서 스포이트로 실험 물질을 옮기는 연구원을 찾아가기도 했고, 피자를 만드는 사람을 찾아가기도 했다. 바느질 하는 할머니를 찍되 바늘과 실 없이 바느질 동작만 하는 할머니를 촬영했다. 피자를 만드는 모습을 찍는 게 아니라 도우 없이 피자 만드는 동작만 촬영했다.

“처음엔 도구가 없어지니까 다들 어색해하더라고요. 어, 이렇게 했나, 아니다, 이렇게 했나,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동작이 익숙해졌어요. 그 일을 오랫동안 한 분들일수록 어색함이 덜해요. 바느질 하는 할머니 같은 경우엔 바늘과 실이 없어도 실제와 똑같이 하시더라고요. 신기했어요. 그 동작들을 모아놓으니까 얼마나 리드미컬한지 몰라요. 그리고 도구가 없고 동작만 있으니까 이상하게 슬프기도 해요.”

이랑씨가 일하는 사람들의 동작으로 뮤직 비디오를 만들게 된 출발점에 ‘관찰’이 있었다. 이랑씨가 좁은 주방에서 식당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동작이 무척 리드미컬하다는 걸 깨달았다. 좁은 주방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일의 능률을 높일 수 없었다. 리듬이 곧 능률이었고 리듬이 생명이었다. 반복되는 동작을 최대한 즐겁게 해야 했다. 이랑씨는 일하고 있는 자신의 발을 카메라로 촬영했다. 일하고 있는 발이 춤추는 발처럼 보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 두 번째 앨범을 만들면서 되살아났다.

관찰이란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틈을 만들어내는 일이고, 그 틈에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화면이었겠지만 그들에게서 도구를 빼앗는 순간 평범한 시선이 능동적인 관찰로 변했다. 이랑씨의 노트에는 그런 관찰들로 가득했다. 시나리오 아이디어, 카툰 아이디어, 노래 가사, 무의미해 보이는 낙서, 가장 솔직한 마음의 표현들이 빼곡하게 수집돼 있었다. 이랑씨가 자신의 관찰을 영화에다 담는 방식은 다음 회에 계속.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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