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민승 기자

등록 : 2017.09.12 04:40
수정 : 2017.09.12 15:58

[아세안 50년, 변방에서 중심으로] 시진핑ㆍ아베 나서는데 한국은 장관이… 세일즈 외교 ‘역부족’

2부: 뜨거워지는 쟁탈전 <3> 한발 뒤늦은 한국

등록 : 2017.09.12 04:40
수정 : 2017.09.12 15:58

말레이ㆍ싱가포르 고속철 수주전 유치 나선 철도시설공단 “힘에 부쳐”

한국, 중국의 경제 보복 위협 무시하다 사드 파장 생산시설까지 확대

“정부, 첫 아세안 특사 파견 등 노력했지만 비효율적 ODA 집행 등 아쉬워”

지난 3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시민들이 센트럴역 인근의 한 쇼핑몰에 위치한 KTX홍보관을 둘러보고 있다. 많은 인파로 북적대는 바깥과 달리 홍보관 내부는 한산하다.

품질을 앞세운 일본과 물량을 내세운 중국이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축전을 펼치고 있지만 한국의 존재감은 미미하기 그지 없다.

일본과 중국의 자존심 대결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 수주전에서도 잘 나타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수 차례 나서 일선에서 세일즈 외교를 벌이고 있지만 뒤늦게 수주 홍보전에 뛰어든 한국은 지난해 6월 강호인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이 찾은 게 전부다. 한국철도시설공단 말레이 쿠알라룸푸르 사무소 관계자는 “이후 지난 3월 정세균 국회의장이 말레이시아를 방문, 한 차례 지원 사격했다”며 “하지만 여전히 힘든 게임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낮은 아세안에 대한 관심

문재인 정부는 아세안과 4강 수준의 외교 관계 구축 계획 발표, 특사 최초 파견 등 아세안에 대해 관심을 표하며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선진 전 자카르타 대사는 11일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보복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안에서 봐야 하는데, 이는 아세안과 한반도로 전선을 바꿔가며 움직이는 중국의 행태를 관찰했다면 일찌감치 예상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도 이런 차원의 동남아 이야기를 꺼내면 ‘한가한 소리 한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라고 전했다.

중국의 행보를 예상하지 못한 대가는 혹독하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서쪽으로 60㎞ 가량 떨어진 쿤산(昆山)에서 20년 넘게 주요 글로벌 브랜드들의 가방을 생산하고 있는 한 업체 관계자는 “통관 지연으로 납기 못 맞추는 일이 허다하고 업체들에 대한 검열 강화로 갖은 트집을 잡아 생산라인을 1,2주씩 세우는 일이 예사로 일어나고 있다”면서 “아세안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생산기지 분산을 통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사드 보복으로 인한 국내 기업들의 피해는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조기 진출 기회 놓쳐

최근 새삼 주목받는 아세안이지만 보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더 일찍 아세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연구위원은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일본기업들이 지난 2005년 교과서 문제로 촉발된 중국 내 일본제품 불매운동 한번으로 줄줄이 꼬꾸라지면서 ‘차이나 + 1’ 정책을 통해 생산 거점을 동남아로 재편했다”며 “일본 사례 연구를 통해 우리도 생산 기지를 분산시켰더라면 지금처럼 피해가 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이나 + 1 정책은 중국을 기반으로 하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생산 거점을 주변국에 하나 더 놓는 전략이다.

외교가 관계자는 “중국의 사드 보복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중국의 이번 행태는 2005년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로 중국에서 일어난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넘어서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뿐만 아니다. 이후 일본은 태국에 구축한 자동차, 전자 산업 생산 네트워크가 지난 2011년 대홍수로 마비되자 이번에는 ‘타이 + 1’ 정책을 펼쳤다. 태국 생산시설들을 주요 기반으로 삼되, 관련 생산 시설들을 국경 지방과 인접국으로 하나씩 옮겨 재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태국과 접한 라오스 사바나켓 경제특구의 통사이 사야퐁캄디 경제특구청장은 “태국 홍수 이후 니콘 카메라 등 일본 기업들이 대거 입주, 안정적으로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쉬운 선택과 집중

일본은 기업들의 동남아 내 분산 배치를 통해 각국의 정치적 리스크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에 따른 위험부담도 줄이고 있다.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도 물론이다. 베트남 내 한 철강업체 관계자는 “당시 일본 정부는 시장조사와 사업자금 대출 등으로 중국과 태국의 자국 기업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지원했다”며 “한국 정부는 국내로 유턴하는 기업들만 지원해 일본과 대조적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의 인건비 상승과 맞물려 생산기지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면서 일부 기업들이 동남아 국가로 진출을 타진했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아세안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국이 노력하고 있지만 아쉬운 대목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부처별로 분절화돼 효율성이 떨어지는 공적개발원조(ODA) 예산 집행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경우 한국의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해당하는 자이카(JICA) 깃발 아래 각종 원조 사업을 체계적으로 펼치고 있지만, 한국은 ODA 예산이 40개가 넘는 기관에 분산돼 집행되고 있다. 정해문 전 주 태국 대사는 “각 부처가 해외 원조를 블루오션 영역으로 여기고, 예산과 인력 확대를 위해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며 “공적원조 규모를 키우고 매년 관계기관 협의회를 개최하는 것 외에, 범 정부차원의 감독을 통해 중복사업을 없애고 가성비 높은 사업을 발굴하는 등 공적 원조 사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쿠알라룸푸르ㆍ자카르타ㆍ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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