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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유령들의 사연 들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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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유령들의 사연 들어 볼래요

입력
2014.09.2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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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키 빌랄 지음ㆍ정연복 옮김

열화당 발행ㆍ150쪽ㆍ2만8,000원

세계 SF만화 3대 거장 엔키 빌랄

작품 사진에 상상적 그림 덧입혀 스물두개의 이야기 만들어 내

# 믿거나 혹은 말거나

루브르 박물관에 유령이 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떤 이는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모나리자’ 근처에서 볼이 움푹 패이고 눈빛이 불안한 30대의 청년을 봤다고 했고 (가슴에 길게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을 관람하던 이는 오른쪽 눈에 자상을 입은 한 여인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고 말했다(여자는 온 몸이 으스러져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여러 개의 입을 타고 만들어진 소문일 뿐, 정작 자신이 목격자라며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유령의 복수를 두려워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명성에 손상을 입을 것을 두려워한 박물관 측이 재빨리 입막음을 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엔키 빌랄의 ‘루브르의 유령’이 번역됐다.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프랑스 작가로 만화, 영화, 디자인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빌랄은 뫼비우스, 드뤼이예와 함께 세계 SF 만화 3대 거장으로 꼽힌다. 대표작 ‘니코폴 3부작’과 ‘야수 4부작’에서 보여지듯 폐허가 된 미래 세계를 음울한 필치로 그려온 작가는 이번엔 예외적으로 과거에 주목했다.

2012년 작 ‘루브르의 유령’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예술작품에 유령이 붙어 있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원한 때문에, 미련 때문에, 혹은 갈 곳이 없어 작품 곁을 떠도는 유령들을 대신해 작가가 각자의 사연을 들려준다.

함무라비 법전 주위를 떠도는 유령의 이름은 엔헤두아나 아르위-아다. 기원전 1776년 고대 바빌로니아의 도시 시파르에서 태어난 그는 손재주가 뛰어나고 똑똑한 소녀였으나 노예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인자한 후견인의 도움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된 그는 곧 자신이 설형문자판에 글을 새기는 데 뛰어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열여덟 살이 된 엔헤두아나는 함무라비 왕 주변의 의사들 중 한 명과 결혼하고, 그 인연으로 왕의 비석에 법전을 새기는 작업에 여성 최초로 참여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가 새긴 문구는 아이러니하게도 노예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노예를 성문 밖으로 도주하게 한 이는 사형에 처한다는 글을 새기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함무라비 왕이 죽은 뒤 누군가의 고발로 노예 출신이 발각된 엔헤두아나는 남편에게 쫓겨나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1년 뒤 어느 사원의 돌 아래에서 온 몸이 으스러진 채 발견됐다.

미련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유령도 있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아티카에서 제작된 ‘말의 머리’조각은 사실 아마존 왕국의 여전사 마르파다의 말을 본 딴 것이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거나 버리고 여자 아이만 골라 용맹한 전사로 키웠다는 전설의 아마존 왕국에서 마르파다는 최고의 전사였다. 그가 ‘인생의 말’을 만난 것은 열여섯 살 무렵, 아티카로 파견된 전투 병력에 배속됐을 때였다. 말이 내는 소리를 따라 ‘오우이키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그는 말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눈부신 공로를 쌓았다. ‘불 같은 말을 모는 민첩한 기사’ ‘마성의 화살 궁수’가 그의 뒤를 따르는 별명이었다. 한 예술가가 그 소문을 듣고 말의 머리를 조각했는데, 벌어진 입과 콧구멍에 바른 붉은 안료 때문에 말은 정말로 불을 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르파다와 오우이키이의 마지막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한 전투에서 수 차례 창에 찔린 말은 격분한 나머지 뒷발로 서서 자신의 주인을 떨어뜨렸고 마르파다는 말발굽에 짓밟혀 죽고 말았다.

괴이한 상상력으로 탄생한 스물두 개의 사연은 같은 개수의 그림과 짝을 이룬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 거기 전시된 작품을 사진으로 찍었다. 400여장의 사진 중 스물두 장을 골라 캔버스에 인화한 뒤 아크릴과 파스텔로 그 위에 유령을 덧그렸다. “왜 스물두 장이며, 왜 그 작품인가” 하는 질문에 작가는 “답이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스물두 명이 신호를 보냈고 다른 유령들보다 더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과 공간에 일체가 돈 그들이 길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부각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유령들에게도 야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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