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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평가된 헌재

입력
2014.12.24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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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혁의 민주주의는 서로 다르다.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의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대척점에 둔다면 평등과 정의를 앞세우는 진보의 그건 권위주의 독재와 맞서는 가치다. 압도적 다수 재판관의 지지로 보수 편에서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며 헌재 탄생 배경인 통합 가치로서의 민주주의도 끝났다. 사진은 19일 서울 북촌로 헌재 청사 대심판정에서 열린 통진당 정당 해산 심판 청구 사건 선고에서 주문을 읽고 있는 박한철(가운데) 헌재소장.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보혁의 민주주의는 서로 다르다.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의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대척점에 둔다면 평등과 정의를 앞세우는 진보의 그건 권위주의 독재와 맞서는 가치다. 압도적 다수 재판관의 지지로 보수 편에서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며 헌재 탄생 배경인 통합 가치로서의 민주주의도 끝났다. 사진은 19일 서울 북촌로 헌재 청사 대심판정에서 열린 통진당 정당 해산 심판 청구 사건 선고에서 주문을 읽고 있는 박한철(가운데) 헌재소장.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헌법재판소는 과대평가됐다. 사법에 법이 없다. 신념도 사치다. 영합으로 보신은 성취된다. 공평할 리 없다. 반(反)독재는 가뭇없다. 온통 반공뿐이다. 해체가 대세다. 권력의 뜻이다.

“권력자의 눈치나 보는 타락한 재판관 대신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하는 법관이 바로 근대 사법의 이상이었다. 그런 이상형에 가까운 모습이 아마 미국 연방대법원일 것이다. 연방대법관 9명은 ‘9인의 현자(賢者)’로도 불린다. 연방대법원이 가장 신뢰받는 국가기관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이들 대법관이 탁월한 법률지식과 논리에 더해 시대와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철학으로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는 믿음이 쌓여왔기 때문이다. (…) 역시 9명으로 구성된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그런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가. 지난 십몇년 동안 헌재 재판관은 대부분 고위법관이나 검찰 고위직으로 채워졌다. 법조계에서는 재판관 자리를 이런저런 이유로 대법관이나 검찰총장 등에 오르지 못한 이들을 배려하는 자리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색이 강한 이들이 대부분이니, 국민의 뜻을 여론 지형에 맞게 반영하지도 못한다. (…) 이는 우리 헌재가 민주적 통제와는 전혀 무관하게 구성되는 데서 비롯된다. 헌법은 대법원장뿐 아니라 대법관들도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고 있다. 선거를 거치지 않았다는 민주적 정당성의 부재를 국회와 대통령을 거치도록 함으로써 간접적으로라도 메운다는 취지다. 하지만 헌재에 대해선 소장 임명만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국회법도 재판관 9명 중 국회에서 선출하는 3명만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했을 뿐,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6명은 국회 동의와는 무관하게 임명된다. 6명이면 위헌 결정의 정족수다. 그런 숫자를 국회와는 아예 무관하게 임명되도록 했으니, 멀리 있는 국민보다 눈앞의 지명권자와 임명권자의 뜻을 더 의식하게 된다. (…) 이런 모습이라면 ‘법복을 입은 정치인’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과한 듯하다. 오히려 ‘다음 자리’를 찾는 ‘사법 관료’라는 표현이 거칠지언정 더 정확해 보인다. (…) 무엇보다 헌법이나 법률을 개정해서라도 헌재 재판관 전원의 임명에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것이 옳다. 권력의 심기를 살핀 탓인지 수십년 쌓인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엉성하게 엮은 결정을 서둘러 들이미는데도 무작정 고개를 주억거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9인의 현자’인가(한겨레 ‘아침 햇발’ㆍ여현호 논설위원) ☞ 전문 보기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앞말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다. 뒷말은 이정희 전 진보당 대표의 일갈이다. 각각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 해산이라는 사법적 사망선고를 옹호하거나 비판하고 있다. 신문들 역시 민주주의의 잣대로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고 있다. 보수 신문은 “이념의 다양성은 지켜야 할 가치이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적에게까지 관용을 베풀 수는 없다”는 동아일보 사설의 언급처럼 대체로 대통령과 같은 눈높이에서 헌재의 결정을 엄호하고 있다. (…) 해방 직후 반공우익 진영이 만든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프레임이 온전히 작동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보 신문은 “민주주의 후퇴시킨 진보당 강제 해산”이라는 경향신문 사설 제목과 “민주주의의 죽음, 헌재의 죽음”이라는 한겨레신문의 사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헌재의 결정이 민주주의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고 비판하고 있다. (…)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산물인 민주주의 대 독재 프레임 역시 오늘날 진보 진영에 강고히 뿌리내리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당파성이 덧씌워질 때, 민주주의는 사회 갈등을 상징하는 기호로 작동한다. 이와 달리 해방 직후에 분출했던 신민주주의는 통합과 중도의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복지, 평등, 정의를 강조하는 사회민주주의가 공존했고, 지금의 헌법도 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번 헌재 재판관들의 진보당 해산 결정에서 보여준 8 대 1의 쏠림 현상은 헌법에 녹아들어 있는 통합 가치로서의 민주주의를 무색하게 한다. 여기서 우려되는 점은 앞으로 진영 간 민주주의 논쟁이 서로를 더욱 양극단으로 몰아붙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헌재의 진보당 해산 결정이라는 위기적 대사건으로 우리 앞의 민주주의 역시 사회 갈등의 확장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사회 통합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도 있는 기로에 서게 됐다. (…) 2014년 갑오년 말미엔 6월 항쟁, 즉 사회통합적 민주주의가 탄생시킨 헌재가 확실하게 한편에 서면서 민주주의와 헌법에 당파성을 부여하는 위기적 대사건의 주역이 되었다. 을미년을 맞아 갈등과 통합의 기로에 선 민주주의가 갈 길을 정하는 역사적 임무는 이제 시민의 몫이 됐다.”

-기로에 선 민주주의(경향신문 ‘정동칼럼’ㆍ김정인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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