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최문선 기자

등록 : 2017.12.04 04:40

임흥순 "나는 역사 희생자들을 위한 장의사"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국현서 개인전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등록 : 2017.12.04 04:40

한국 현대사서 보통의 삶 빼앗긴

김동일 등 할머니 4명 인생 추적

“기억해야 아픈 역사가 반복 안돼

사연 각각 달라 그냥 느꼈으면…

대기업 후원받아 비주류 다룬다?

그 돈은 노동자의 돈이기도 해”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여는 임흥순 작가. 창문을 핏빛 빨강으로 칠한 건,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자는 메시지다. 작가는 "빨강을 좋아하진 않는다. 파랑과 섞으면 초록이, 빨강과 섞으면 주황이 되는 노랑, 예술의 역할은 노랑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나는 장의사다. 우리 역사에서 언제나 소외된 피해자였던 분들의 삶을 정리해 드리는 것, 그게 내가 하는 예술이다.”

미술계에서 최근 가장 뜨거워진 이름, 임흥순(48). 여성 노동자의 신산한 삶을 조명한 영상 작품 ‘위로공단’으로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아 ‘종신 주류’를 약속 받은 작가.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대형 개인전 ‘MMCA 현대차 시리즈 2017: 임흥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여는 그를 만났다.

이번엔 할머니들이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국현)에서 내년 4월 8일까지 열리는 전시는 김동일(1932~2017) 정정화(1900~1991) 고계연(1932~) 이정숙(1944~) 등 4인의 인생을 추적한다. 가족 대부분을 지리산에서 잃은 빨치산 출신(고계연), 일본으로 밀항해 영영 귀국하지 못한 제주 4ㆍ3 사건 피해자(김동일), 중국으로 망명한 항일 독립운동가(정정화), 베트남전 참전부대 위문공연단 무용수(이정숙)까지, 아시아 현대사의 격랑에 보통의 삶을 빼앗긴 이들이다. 다채널 영상, 설치, 아카이브 등 다양한 매체를 쓴 전시에선 ‘거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작가의 야심이 느껴진다.

-4ㆍ3 사건이 주제인 ‘비념’(2012)과 ‘위로공단(2014ㆍ2015)’, 탈북 여성을 다룬 ‘려행’(2016)에 이어 줄곧 비주류 역사를 영상에 담는 건 왜인가.

“역사 속에 고통 받은 분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예술의 의무는 거기에 답하는 것이다. 기억해야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역사의 교훈은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서 더 잘 보인다. 어둠을 밝히는 것이 예술이고, 내 역할은 사회가 언급하기 꺼리는걸 끄집어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붓 대신 카메라를 들었나(작가는 가천대로 이름이 바뀐 경원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예술은 몸과 마음으로 부딪히며 하는 것이다. 현실에 도움 되는 미술을 하고 싶었다. 미술관에 갇힌 미술로는 한계를 느꼈다. 내가 만드는 게 미술인지 영화인지, 그 경계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나의 정체성은 관객이 정해주는 것이다.”

김동일 할머니의 유품 4,000여 점을 모은 전시, '과거라는 시를 써 보자!'. 할머니가 그리워 한 보통의 삶,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을 상징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왜 작품에서 여성들을 따라다니나.

“남성의 역사는 남성 스스로 이미 많이 기록했다. 여성에겐 기회가 없었다.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에 매력을 느낀다. 세상의 중심에서 멀리 물러나 있었기에 더 넓고 지혜롭게 본다. 내 어머니도 그렇다. 평생 봉제공장 시다(보조공)로 살았지만 더없이 밝은 분이다. 사회를 치유할 희망을 여성들로부터 찾았다. 나이 든 여성의 주름살이 좋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수많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 설화, 무속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앞으로도 남성 이야기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작가는 김동일ㆍ정정화ㆍ고계연씨의 삶은 3채널 신작 영상 ‘우리를 갈라 놓은 것들’에, 이정숙씨의 삶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에 소장된 2채널 영상 ‘환생’에 풀어놨다. 서사보단 표현에 집중한, 자체가 은유인 작품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와 같은 주제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내년 발표한다.

-할머니 4명의 사연이 각각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독해가 쉽지 않은 상징들이 등장해 전시가 어렵다는 평이 있다.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느끼면 좋겠다. 뭔가를 설명하려고 작정한 전시가 아니다. 2010년 이후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들을 때마다 울컥했다. 대단한 일을 한 분들이어서 마음이 간 게 아니다. 거친 운명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산 삶 자체가 감동이었다. 김동일 할머니의 유품 4,000점을 전시장의 한 공간에 모아 뒀다. 고운 옷이 참 많다. 그런 걸 좋아한 평범한 분의 삶을 역사가 끝내 파괴했다고 생각하면 먹먹해진다. 할머니들이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는가를 관객이 고민하게 하고 싶다. 답은 내가 제시하는 게 아니다. 나는 할머니들의 인생을 어루만지고 담담하게 보내드리는 장의사다.”

작가는 43분짜리 3채널 영상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 상영되는 전시장을 실험연극 무대처럼 꾸몄다. 전시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전시가 됐다. 신상순 선임기자

“억울한 죽음을 슬퍼 마세요.” 영상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은 김동일 할머니의 노래로 끝난다. 할머니와 작가는 분노를 토해내기는커녕 남은 이들을 위로한다. 작가의 아버지는 공사장 인부였고, 형은 트럭 운전수, 여동생은 백화점 판매원이었다. 그런 그가 사회의 어둠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그렇게 따뜻하다.

“우리 가족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미술을 하느라 돈이 많이 들었다. 부모님은 이웃에서 돈을 빌려다 주면서까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라고 하셨다. 나는 이를 테면 정서적 금수저다. 가난은 비참이 아니다. 타인과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난의 경험에서 얻었다. 요즘 세상은 내가 살려면 남을 다 죽여야 한다는 원리로 돌아간다. 박근혜 정부에서 발생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도 거기서 나왔다. 나도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털렸다. 하지만 화 내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을 해서 사회가 진보한다면 충분하다.”

-비주류의 역사를 다루는 영화 감독이 현대차라는 대기업 후원을 받아 전시하는 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나(현대차는 국현이 매년 선정하는 중진 작가 개인전에 10년 간 120억원을 지원한다). 이제 명실상부한 주류가 된 건가.

“그 돈은 기업에서 나왔지만 노동자의 돈이기도 하다. 지원금을 전시에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류가 아니라고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큰 상을 받고 괜찮은 제안들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서울대ㆍ홍익대 미대 출신이 아닌데도 잘 됐다는 선례가 된다면 좋은 일이다. 다만 기득권을 활용해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식의 욕심은 없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영상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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